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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젝트홀릭 Sep 14. 2018

케인스 vs 하이에크 - 하이에크편 상

하이에크에 대해서 알아보자.

저변편에 이어서 케인스의 영향은 여러모로 컸다. 케인스는 오랫동안 그리고 특히 1960년대같이 부유한 시대를 만들어냈다. 1950년대가 풍요가 확산되는 시대였다면 1960년대는 평균 수준의 노동자가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시대였다. 컬러텔레비전과 항공 여행, 집집마다 여분의 차를 두는 호화로운 생활이 보편화 됐다. 케인스주의는 미국의 36대 대통령 존슨 시대에도 계속해서 기적을 이어 갔는데, 생산성은 높아졌고,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실질 보수는 두 배로 늘어났으며, 실업률은 4년 동안 평균 3.9퍼센트로 낮아졌다. 존슨은 국내 정책을 정비한 것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에서 무장 봉기한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총 50만명의 미국인이 베트남에 파병됐고, 그에 따라 국방비의 지출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그에 따라서 재정은 흑자를 유지했지만 흑자 규모는 급격히 줄었고, 물가 상승률은 다시 공개를 들며 4.2퍼센트까지 높아졌다. 점점 악화되던 미국의 경제는 그 후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임기 때에도 뜻대로 풀리지 못하고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다. 






제4차 중동전쟁(1973년 10월 6~25일)때 미국이 이스라엘의 무장을 지원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1973~1974년 아랍 국가들의 석유수출기구 OPEC가 유가를 네 배로 올려버린 것이다. 유가 충격으로 물가는 더욱 높아졌고, 경제 성장에는 육중한 제동이 걸렸다. 저성장이나 제로 성장 상황에서 물가가 오르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이 두현상이 동시에 나타나 “스태그플레이션”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케인스의 시대는 임종의 진통을 맞았고,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가 도래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도래 그리고 하이에크. 



물론 미국뿐만 아니라 제임스 캘러헌 총리가 있는 영국처럼 다른 나라들도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별다른 묘책은 없었다. 오랫동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은 케인스주의도 마침내 수명을 다한듯했다. 특효약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듯이 그의 처방을 내미는 사람들은 그 묘약을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처방한 듯 했다. 바야흐로 경제 이론을 근본적으로 재평가 할 때가 온 것이다. 하이에크와 그 동맹자들이 오랫동안 기획해 왔던 일이다. 이를 언급하기 전에 하이에크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하이에크에 대하여




케인스의 집안과 같이 학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집안에 많았던 하이에크. 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원래 대학 강사가 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사로 생활했다. 그의 뜻을 물려받았을까. 하이에크는 전시 군 복무에 들어가면서부터 전쟁이 끝나는 대로 대학 강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케인스보다 열여섯 살 어린 하이에크는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당시 15살이었다. 세형제 중 맏형이었던 하이에크가 막 18세가 된 1917년 3월 오스트리아 군대의 장교가 되겠다고 서명했다.

전쟁이 마지막 해로 접어들었을 때 하이에크는 훈련 과정을 막 마치고 통신 장교로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됐다. 거기서 목숨을 잃을뻔한 일을 적어도 네 번이나 겪었다. 하지만 많은 고통 외에도, 전선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끝이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무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루함의 나날이었다. 당시 하이에크는 독서에서 위안을 찾았는데 이때 책 한 권을 빌려봄으로써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되고, 평생 열정을 쏟는 학문이 되게 되었다. 

                                                                             하이에크의 모습 




스승 미제스와 연구소에서의 연구


전쟁 이후 여러가지 활동을 하던 하이에크는 미제스라는 스승을 만난다. 그리고 1926년 하이에크의 스승 미제스는 오스트리아 경기순환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자금 마련에 나섰다. 연구소장은 그의 제자인 하이에크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1927년 1월 1일 하이에크의 지휘하에 연구소의 활동이 시작됐다.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연구 위에 자신의 연구를 쌓아 갔고, 화폐와 물가, 실업의 상관관계를 상세히 파악해 가기 시작했다. 하이에크는 금리 인하로 값싸진 돈이 자본재 투자에 들어갈 때 정확히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따져 봄으로써 미제스의 분석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그는 금리를 의도적으로 낮춰 저축과 조응하지 않는 투자에 돈이 들어가면 ‘생산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진다고 보았다.  생산기간이 길어지면, 개발되는 자본재, 특히 ‘우회 생산 단계가 높은 자본재(소비재 생산에 쓰이는 기계를 생산하는 기계처럼 최종 소비재와 아주 거리가 먼 기계류나 중간재)’의 상당부분이 생산완료 시점에 이르러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폐기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다. 가령 아이스크림 수요가 침체되면 상업용 냉장고안의 제빙용기를 제조하는 공장이나 그 공장에서 쓰는 기계를 만드는 공장은 파산하기 쉬울 것이다. 





하이에크가 보기에 많은 문제의 핵심은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춤으로써 저축과 투자의 관계에 개입하는 것 때문이었다. 하이에크를 대표로 하는 오스트리아학파는 자금 시장을 비롯한 모든 시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산자가 만드는 상품의 공급과 수요가 결국 일치하게 되는 균형 상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에크는 가격 메커니즘이 이 균형을 향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으며 가격을 인위적으로 변경하려는 모든 시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봤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가격에 간섭하는 것은 균형을 향해 움직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개별 증상을 붙잡고 땜질하는 정도의 쓸모 없는 조치에 불과했다. 하이에크는 시장 금리를 자연금리대로 계속 유지하면 화폐가 경제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중립적’일 수 있다고 봤고, 화폐가 중립적이면 신상품의 발명이나 새로운 발견과 같은 다른 요인의 변화에 의해 경기 순환이 유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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