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때로 웅변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_베른하르트 슐링크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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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비밀은 있다'

어떤 영화의 제목이었던가?

이렇게 평이한 한 문장이 사실은 지극히 진리에 가깝게 느껴지는 일,

그것은 나 역시 언젠가, 그리고 지금도 나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을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읽어주는 책을 듣는 여자, '한나'에게도 비밀은 있었다.

이제와서는 그것이 비밀이었는지, 혹은 약점이었는지, 기만이었는지 혼란스러워지고 말았지만, 분명 그 순간 그것은 비밀이었을 것이다.


<더 리더>는 열다섯 소년이 간염에 걸린 시기, 서른여섯의 연상의 여인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운명'이었을까, 소년은 연상의 여인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남자였고, 한나는 언제까지나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다. 직장에서 승진을 앞둔 어떤 날의 돌연한 실종이었다.

아니, 실종이 아니라 잠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세월이 흘러 한나는 대학생이 된 소년 앞에 사라질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다시 나타난다.

그들이 재회한 장소는 어느 골목이나, 식당, 카페가 아닌 '법정'이었다.

한나는 법정의 한 가운데 서서 배심원과 재판관, 검사들과 맞서 서 있는 피고인이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알 것이고,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한나에게는 커다란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밝혀지는 것보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기를 선택할 만큼 한나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는 비밀이다.

그리고 그 비밀은 아주 오랜 시간 지켜진다.

한나가 죽은 이후에도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을 만큼.

한나가 법정에 서야 했던 이유, 한나에게 돌아간 혐의는 나치의 학살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한나는 나치의 학살을 돕지도, 막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한나의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의 범위는 단지 그곳에 '있는' 것뿐이었고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나가 한 일은 나치가 '지시'한 것뿐이었다.

지시를 따른 것이 죄라면 죄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한나에게 돌려진 혐의들은 적어도 한나가 전부 책임져야 할 것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나는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자백한다.

'뒤집어 쓴다'는 말이 자발적 의지를 포함할 수 있는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나는 '기꺼이'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감옥으로 향한다.

재회 아닌 재회 이후,

그러니까 한나가 감옥으로 간 이후에 소년은 다시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더는 소년이 아닌 소년은 한나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는다.

편지 한 통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더 이상 한나가 지키려 했던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구체적으로는 비밀이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꾸어 지킬만한 것은 아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한나는 변했다.

오히려 변하지 않은 것은 소년 쪽이었던 셈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은 어딘가 한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처음으로 읽은 작품인 <귀향>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오랜 여행을 통해 고향, 아내의 곁으로 돌아왔던 여정을 근대에 재연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고, 이 책 <더 리더>에서는 오래전 커다란 상처와 함께 의문으로 남았던 비밀이 풀여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 같았다.

"때로 침묵은 웅변보다 커다란 설득력을 갖는다."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천천히 그려 보여주는 편이 더 커다란 공감과 이해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떠나지 않았던 궁금증은 역시 한나의 행동들에 대한 것이었다.

웅변하듯 하는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것,

한나가 정말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

어쩌면 오래전 소년을 처음 만났던 시절의 생활에 가까운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순간에 선택한 죽음,

한나의 행동들은 온갖 의구심을 일으키다 갑작스러운 순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멈추어 끝이 난다.

한나는 무언가와 끊임없이 싸웠다.

그 싸움이 무엇인지는 소년도, 작가도, 독자인 우리도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싸움은 분명 어느 순간 끝이 났을 것이고,

그렇기에 한나는 또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호기심을 일으키고 궁금증을 자아내며 되새기고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은 분명 좋은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면 한나의 일들을 좀 더 많이, 수월하게,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지금은 모르겠다.

그저 자신만의 싸움을 끝내고 안식에 든 한나의 안녕을 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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