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성찰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Mar 08. 2024

주문을 외워보자 "내 차에는 경적이 없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주문을 외운다

 아이가 태어날 날이 네 달쯤 남았을 때 우리 차를 샀다. 소도시에 살기 시작한 후에도 꿋꿋이 뚜벅이의 삶을 고집하던 우리에게는 큰 결심이고 사건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다. 대중교통은 배차간격이 크고 노선도 단순해서 같은 거리를 움직이는데 시간 차가 너무 컸던 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택시를 이용하기에는 빈도가 너무 잦고 이동 거리가 길었다. 터미널로 고속버스를 타러 갈 때 보통 7,000원 정도 요금이 나왔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빈도가 더 늘 것이라 예상했기에 부담이 커졌다. 세 번째는 일을 하게 되면서 기동성과 운송 능력 필요가 생긴 거였다. 그렇게 차와 운전이 일상으로 들어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가장 마음 편했던 건 돌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갑자기 끼어들거나 멈추는 차, 언제 바뀔지 모를 신호, 과속과 새로 바뀌는 법규의 위반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이 지금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스스로 운전대를 잡는다는 건 그 마음 편안함과 여유를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건 선택이기보다 필요라서 감당해야만 했다.


 처음 1년은 조용히 다녔다. 경적을 울리는 건 시끄럽고 울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다 점점 경적을 울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새삼 운전대를 잡고 보니 이상한 운전 습관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신호등이 있던 교차로가 회전 교차로로 변할 때 그 혼란이 가장 컸다. 회전교차로 통행법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이따금 보는 블랙박스 사고 영상 속 장면들이 종종 연출됐다. 우선이 되는 회전하는 차를 무시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진입하는 차는 너무 흔했고, 진입하려는 차를 발견한 회전 차량이 중간에 멈춰 서서 출발을 못하고 한참이나 서 있는 장면도 자주 보게 됐다.  비도로에서 도로로 진입하면서 도로에서 진행하는 차보다 먼저 가겠다고 달려 나오는 일도 빈번했다. 기본적인 통행법이나 우선순위조차 모르고 무슨 자신감으로 오히려 경적을 울리고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는지 의아했다. 


 2년쯤 됐을 때부터 회전 교차로에서 회전하는 차를 무시하고 진입하려는 듯 보이는 차를 향해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비상등도 켜지 않고 후행 차량의 통행의 어려움이나 놀람은 고려하지 않은 채 손님을 태우는 택시를 향해서도 경적을 울렸다. 방향 지시등 없이 코 앞에서 차선을 바꾸는 차에도 경적을 울렸다. 굽은 차로에서 차선을 침범하는 차를 향해서도 울렸다. 진입로나 통행로를 막고 자리를 비운 운전자에게도 경적을 울렸다. 한 번 경적을 울리기 시작하니 경적을 울릴 일이 너무 많았다. 경적으로 부족해서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는 말을 속으로 하다가 혼잣말로 하다 들으라고 하는 식으로 일이 커졌다. 


 "질문이 틀린 걸까?"

해가 바뀌고 또다시 만난 이상한 운전에 경적을 울리고 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저렇게 운전해야 했을까?"하고 물으면 좀 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왜'는 탓하고 책망하는 말, '무슨 일이길래'는 이해의 말 같았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도 그렇게 되고 마는 상황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 차에는 경적이 없다."라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서고, 방어 운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고, 속도를 덜 내고, 조금 더 여유롭게 기다려보자고 마음먹으려는 노력이었다. 상대 차를 위해서가 아닌 그들로 인해 화를 내는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자기 운전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거나 가깝거나 먼 어느 날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으로. 


 최근에는 바뀐 법이나 통행규칙이 적용된 운전면허 수험서를 다시 볼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20년도 더 전에 본시험 속 교통 법규에 익숙하기에 오히려 내가 운전하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 자주 '내 차에는 경적이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경적은 그들을 화나게 할 뿐 운전 습관을 바꾸게 만들지는 못하기에. 더 나쁜 건 경적을 울리면 화가 난다는 거다. 단순히 경고나 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화풀이로 경적을 울리는 건데 이건 분명 나쁘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놀라거나 기분 나쁠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적은 득 보다 실이 크다. 양보를 받았을 때 가볍게 울리는 고마움의 표현이나 보행자나 진입 차량 등이 사각에 있을 때 서로에게 미리 알리는 용도 정도로 쓰는 게 그나마 적당하지 싶다.


 빨간 신호에 멈추고, 초록 신호에 출발하거나 진행하고, 노란 신호에는 여유 있게 속도를 줄여 멈추거나 신속하게 빠져나가고, 항상 사이드 미러 등으로 후행 차량을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고, 회전이나 방향을 전환할 때 인접 차량 유무와 상대 차의 속도를 확인하면 되는 쉬운 일이 운전이다. 서로가 조심하고 조금 양보하면 모두가 안전하고 화기애애한 주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므로 실수하거나 양해를 구해야 할 때는 사과하고 요청하면 서로 덜 곤란하고 기분 좋은 양보를 받을 수도 있다. 문제는 다들 너무 바쁘다는 거고, 누구나 자기가 최우선이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의 운전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다들 너무 바쁘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바쁘고 마음이 급할 때, 경적을 더 많이 울리고 있었다. "(급한데) 왜 안 가는 거야?", "(바쁜데) 우선인 사람이 양보를 하겠다고 서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시간이 없으니까) 답답하게 운전하는 차를 앞질러 가야지.", "(나도 늦었는데) 양보할 수는 없지. 어딜 끼어드는 거야!"


 덜 바쁘고 싶다는 마음으로 소도시에 산다. 그럼에도 운전대를 잡으면 마음이 바쁘고 급해지고 마는 것이다. 시간에 딱 맞게, 남보다 빨리, 최단 거리 혹은 가장 빠른 코스로. 

 잦아진 경적은 그렇게 말하는 속마음의 거친 표현이었던 것이다.


평화를 위해 내 차에는 경적이 없다는 주문을 늘 외우는 것이다.

마음과 좁은 지역이라는 한계, 방금 경적을 울린 상대가 앞집이나 뒷집에 사는 누군가 혹은 나와 이해관계로 얽혀있거나 얽히게 될 누군가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시달리지 않는 평화를 위해.


 내 차에는 경적이 없다.

운전대를 잡기 전에 한 번 더 주문을 외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는 꿈꾸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