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바탕을 둔 길과 길을 바탕에 둔 삶에 대하여
말장난으로 시작해볼까 싶다.
제목은 '삶을 바탕에 둔 길과 길을 바탕에 둔 삶에 대하여' 정도로 하고, '길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질문을 첫 문장으로 삼는 거다. 길이란 사람이나 동물, 마차, 자동차가 다니게 땅 위에 난 공간이다. 나도 그렇고 우리 대부분은 길을 내기보다 누군가 만들어 둔 길로 다닌다. 안전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나 무언가에 감사하는 마음 없이 당연하게 여기면서. 길이 있는데 못 다니게 하면 되려 화를 내기도 한다. 길이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마음에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럼 길에 있을지 모른다는 두 갈래는 뭘까. 태생에 대한 얘기다. 어떤 길들은 사람보다 먼저 자리를 잡는다. 요즘에는 거의 모든 신도시나 재개발 도시가 그렇다. 교통 흐름과 관리에 유리하게 길을 내고 사람이 살거나 머무는 공간을 짓는다. 길이나 공간보다 나중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환경에 맞춰가며 살아간다. 더 좋거나 더 나쁠 것도 없이 흔하고 당연하게.
조금 더 예전에는 어땠을까. 조금이 부족하다면 더 옛날에는 다르게 생기는 길도 있지 않았을까. 여기부터는 상상이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실 근거를 대보라고 하면 별로 할 말이 없는 실없는 말이다. 눈처럼 흩날릴 연말의 시간처럼 가벼운 상상.
그때는 사람이 살기 시작해야 길이 생기는 일이 흔했을지도 모른다. 곧게 뻗어있는 길 한편에 집이 하나 생기고, 그 집을 따라오듯 뒤에 집이 하나 더 생기고, 다시 옆에 생겨나는 식으로 계획이나 큰 그림 없이 자꾸 집이 생겼을 거다. 큰길에서 집으로 가는 자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 집들이 이어져서 깊거나 얕은 골목이 생겼을 것이다. 어느 집들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대문을 마주 봤을 테고, 어느 집은 뒷문을 나서면 다른 집 대문이 나왔겠다. 외길처럼 보이지만 사실 갈래길을 숨기고 있었을 그 길은 낯설 때는 막연한 불안이었다가 차츰 몸에 익으면서 푸근하거나 포근해져 갔으리라. 낯선 도시, 어느 골목에서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꼈다면 그건 어린 날의 기억이거나,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에서 온 그리움에서 생겨났을 게 분명하다.
골목이 사라진다. 전국에서 비슷하게 골목 없애기 경쟁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재생이니, 개발이니, 이름은 다르지만 새것을 꿈꾸는 방향도 방식도 닮아있다. 꿈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허물고 시작하는 일도 있다. 비워놓으면 저절로 뭔가 쓰임이 생겨날 거라는 벅찬 희망이라도 품은 걸까.
지난여름 제민천 길가 집이 하나 더 헐렸다. 집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빈터를 보니 터무니없이 작다. 그 집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다. 오며 가며 인사라도 하면 환하게 웃으시며 '고마워요'하시던 분이다. 아이와 함께 다닐 때는 매번 많이 컸다고, 같은 말이지만 매번 듣기 좋게 느릿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셨다. 집이 헐린 건 할머니가 보이지 않게 되고 반년 정도 지난 후다. 좋은 값에 집을 처분하고 어디 아파트에서 편안히 지내고 계셨으면 참 좋겠는데.
그 집은 예전에는 무엇이 되었든 물건을 팔았을 가게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대문보다 더 큰 여닫이 문이 있는데 옛날에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편의점이 다 그렇게 생겼었다. 식당 하기엔 너무 작으니 등하교하는 학생들과 뒤쪽으로 자리 잡은 읍사무소, 경찰서, 우체국 같은 관공서 사람들이 오가며 물건을 사는 가게였을 것이다. 예전에 어디선가 본 70년대 자료 사진에도 그 집이 있었다. 60년, 70년이면 제민천이 흐르는 원도심에 10만 명은 살았을 테니 그 집 앞 길이 얼마나 단단했을까. 골목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이제 그 집이 있던 자리에도 그 주변에도 골목길이 없다. 우연히 아이와 산책하며 찍어둔 사진을 보고 집 한 채의 존재가 얼마나 큰가 새삼 놀란다. 사람이 와서, 삶이 늘어서 더 큰 집을 짓기 위해 잠시 비는 게 아니라 헐린 채로 공터가 된 자리를 보는 마음이 이제 막 시작된 찬 겨울 같다.
그 집이 있던 자리는 이제 한 갈래 길만 남았다. 삶이 만들어낸 길, 안식처로 접어드는 좁은 길을 기억하려고 적는다. 여기, 그 길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