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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 정 Jan 08. 2021

다시 한번 더, 살고 싶다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



출장을 다녀오니, 노트북 전원 케이블을 사무실에 두고 온 걸 다음날이 돼서야 알았다. 재택근무라고 조금 방심한 탓이었나 마치 연차를 당장 써야만 해,라고 누가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꿀 같은 휴일을 얻었고 나는 덕분에 책 한 권을 오랜만에 읽었다. 연필이 갖고 싶어서 받게 된 책이었지만 아마 문구에 반했으니, 작가에게 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나는 허지웅을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봤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잠시 JTBC 파일럿 프로그램에 막내로 일하고 있을 때 스치듯 실물을 본 적이 있다. 빼빼 마른 몸에 뭔가 날렵한 눈매를 가졌던 이 사람은 웃음소리가 독특했고, 잘 모르는 PD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마녀사냥'에서 낄낄 대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 사람도 연예인이 될 평론가쯤이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가끔, 예시를 드는 영화나 책, 애니메이션 등이 궁금해지게 할 때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그리고 기사로 그가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마른 몸이 다시 생각이 나서 더 안타까웠다. 그 사람의 인스타그램까지 들어가서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았단 얘기와 함께 살아내자는 말을 적은 글을 보고 뭔가 위로를 하고 싶었으나 하지 않았다. 글에서 느꼈지만 살고 싶어도 이제 견뎌보겠다는 일종의 자기 다짐 같았다. 


그리고 다 이겨낸 후에 이 책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꽤나 그때의 보여지지 않았던 모습을 현실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책 제목과는 다르게 어느 날 죽고 싶었다는 문장과 함께 나 또한 다시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문장들에는 아픔이 곳곳에 묻어있지만 감히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잊혀가고 있던 나의 병상 일상도 번뜩하고 떠오른 걸 보면.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기만 해 봐야 알 수 있다. 이게 살려는 건지, 살고 싶은 건지, 살 수는 있는 건지에 대한 선택지도 없이 그저 에너지바(HP)가 애써 더 닳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혹은 그렇게까지 애써야 할 필요가 있나 진짜 아픈 게 죽어도 싫은데, 라는 말로 화를 내비치기도 한다. 


'이길게요'의 마지막 모음이 동그랗게 말린 입술 끝에서 아직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벌써 침상위에서 방금 분명히 잠들었던 것 같은 고양이마냥 펄떡거리고 있었다. 아팠다. 모르핀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질게요! 어찌 됐든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에 관한 이야기 따위를 하려는 건 아니다. (p.18)


간략하게 항암치료의 과정을 생략하고 뒤 이어 쓴 내용들은 괜한 자기 계발서의 위로는 없어서 좋았다. 허지웅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질문 혹은 이야기를 전해 받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어쭙잖은 위로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허지웅이 쓴 문장이라고 생각 안 하고, 친구가 올린 연필에 쓰인 문구에 반했던 부분도 비슷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망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시간을 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p.74)
너 혼자서는 세상 못 바꾼다. 청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사한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라. 마케팅이다. 하나의 의견이 공론화의 과정을 밟고 생각이 전혀 다른 집단 사이에 합의를 거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따른다. 그마저도 합의안이라는 것이 누더기일 가능성이 크고, 누더기에 다른 누더기를 보태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 (p.218)


사람은 어리석게도 아팠던 시간이 조금 지나고 회복의 상태로 가면 아팠던 그때를 금세 잊는다. 온몸에 힘이 없어서 물건 하나 집거나 한 걸음을 옮길 때도 힘들었던 내가 운동을 하게 되고 해야겠다, 하고 싶다 라는 일들이 생기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허지웅의 문장들은 담백한 편이고 생각 외로 문장 속에 기분이 잘 녹아들어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지만 에세이답게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밀접함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이 곳곳에 담겨있어서 나에겐 꽤 좋았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p.274)



나는 디지털화된 글을 보기 힘들어하면서 쓰고자 할 때는 타자기를 결국 잡게 된다. 매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가끔, 잊을만할 때 남기는 이유는 어느 순간엔 꾸준히 되는 한 가지가 생기면 이제 나도 사는데 지친다는 소리를 덜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 올해의 첫 책은 두고두고 남길 문장들을 포스트잇으로 뒤죽박죽 표시했다. 




& 더 하기

1) 이 책에 나오는 성경, 기도문 구문이라던 가, 영화 등은 본 게 별로 없거나 잘 몰라서 신선함과 동시에 스스로 아쉬웠다. 내가 아는 게 별로 없구나.

2) 스타워즈에 대한 설명들은 꽤 매력적이었다. 사실 스타워즈는 'I'm your father.' 밖에 몰랐는데,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이 사람 영화평론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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