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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 정 Oct 02. 2022

22.10.02

잊기 직전에 돌아오는 그런 곳, 일기장


   일기를 쓰지 못한 지 두 달이나 흘렀다. 글을 쓸 때 가장 두려운 건 내 감정과 경험을 품어내는 것이다. 처음 글을 쓰겠다고 맘먹었을 때가 열네 살쯤이었다.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쓰게 되면서 제법 표현력이 있구나,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일이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 다이어리에 적힌 걸로 대신 알려줬다. 놀림을 받기도 했고 사람에게 몰두하는 내 모습에도 놀라기도 했다. 글뿐 아니라 내 마음은 그대로 드러나어 고백을 하지 않았지만 적당하게 걷어차였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내가 못생긴 축으로 평가받고 있었고 나와 짝꿍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남을 울릴 수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했던 선배는 꽤나 친절하게 거절했던 거 같다.)

  그 이후로는 카페를 만들어서 몇몇 친구들과 글을 쓰는 것을 시작했다. 짧은 소설을 쓰기도 하고 일기지만 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써내려 가는 날도 있었다. 쓰다 보니 문장이 길어지고 솔직한 표현들이 더해져서 친구들에게 꽤나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어느 날부터는 내가 작가라고 소개할 때도 있었다. 얼굴로는 평가가 높아질 수 없다면 문장만큼은 누구보다 잘 쓰길 바랬다. 그 글을 바탕으로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교과서 본문 한 줄이라도 읽는 걸 시키면 내 심장소리가 몸을 뚫고 온 사람들에게 들리는 듯하고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를 가졌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터넷 음악방송에선 얼굴이 가려지기에 문장을 읽는 걸 즐길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대학교 때는 긴 치아교정이 끝나고 나를 덜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는 자신감이 그대로 이어졌다. 조별과제, 발표과제 등 대부분의 과제에서 발표를 맡아서 했고 나중엔 과 행사들에서도 간간히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그 사이사이에 관계에서는 늘 어려워했다. 중, 고등학교 때는 너무 투명하게 보이는 나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어 알게 모르게 스치듯 공격하는 말들을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포커페이스라도 해야 하는 건지, 아예 바보인 척을 하는 게 나을지를 고민하던 대학생 때는 가지고 있던 성격이 숨겨지지 않아서 매일 집에서 자기 전에 반성을 해야 했다. 


  '또, 드러냈구나.' 




@넷플릭스, 작은아씨들

  

딱 한 번만이라도 잘했다는 소리를 듣는 게 소원이었는데
하…. 그동안 나는 뭐했을까?
누군가를 위해서 어떤 뉴스를 했었을까?

 

  요즘 보는 예능이나 드라마가 색깔이 마냥 어둡지는 않지만 즐겁거나 밝은 편은 아니다. 습관처럼, 혹은 중독된 것처럼 끊임없이 이어서 본다. 보면서 나를 대입할 때도 있고 내가 겪었던 순간을 장면으로 만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나도 저랬을까, 나는 내가 목표했던 것을 엄청 열심히 해서 후회가 없던 적도 있었을까. 서른이 되고 다른 목표를 가져야 했기에 꾸준히 가지고 있던 글쓰기를 멈췄었다. 아니, 사실 어른이 된 척을 위해서 그만둔 것이 분명했다. 오글거리고, 지겹다는 스쳐 지나가는 말에 더해져서. 

  나에게 글은 대화방법이었다. 그 누구와도 아닌 나와의 대화. 가장 아플 때도, 가장 힘들 때도, 가장 행복할 때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작 일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언젠간 한 편의 다른 세계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꿈꾸면서. 더 나아가 타인에게는 펜으로 써 내려가는 손 편지로 글이 확장되기도 했다. 연초 연말에 가끔 행사를 하는 것처럼 전달하곤 했는데 그 편지쓰기도 어느 순간 놓았다. 주변 사람들 중 한 번은 받아보았다면 넌지시 물어보곤 한다. 올해는 쓰지 않느냐고, 혹은 연애편지만 쓰고 있냐고. 굳이 대답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도 쓰지 못했다. 일방적 쓰기이기도 했고 사랑할 땐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나 또한 쓰는 것을 멈춘 부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말수가 줄고, 참는 것이 늘었다. 감정을 삼키고 아픔을 삼키고. (대신 지금 깊숙이 덮었던 감정들이 이번 일기에 다 쏟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아마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은 다른 것보다 공감을 원하거나 솔직한 마음을 담은 편지에 가까운, 정적보다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밝고 유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팔 수도 없었고 하나의 책으로 엮기도 어려웠다. 그런 목표를 잠시 내려두고 가볍게 일기를 쓰는 것으로 올해는 지나가기로 했다. 쓰다 보면 어떤 것을 잘 쓸지, 어떤 세계를 그릴 수 있을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편으로는 앞자리가 바뀌고 정신없이 지나가던 서른의 기차가 신호에 잠시 멈춰 쉬고 있고 나도 풍경이 잠시 멈춘 창가를 바라보며 생각이 짙어졌을 수도 있다. 번아웃일수도 있고 뜬금없이 생긴 여유과 심심함이 곁들여져서 괜히 날씨나 계절 탓에 쓰인 글일 수도 있다. 




그래도 드문드문 위로와 응원이 곁들여지는 날들도 있고 사람에게 손을 내밀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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