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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떠나보내며

by 서영수

삶은 예기치 않은 일들의 연속입니다. 어느 날 불현듯 닥친 일이 평온한 일상을 단숨에 흔들어 놓곤 합니다. 지난주 월요일,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평소라면 전화를 하실 시간이 아니었기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부터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걱정이 앞서곤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에 계시고, 위독하셔서 입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늘 아프다고 하시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엔 오직 '응급실', '입원', '위독'이라는 단어만 쟁쟁하게 맴돌았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와 계셨고, 아버지는 이미 병실을 배정받아 환자복을 입고 계셨습니다. 코에 산소호흡기를 착용하신 것 외에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말은 달랐습니다. "나이도 많으신 데다, 폐 기저질환까지 있는 상태에서 폐렴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여전히 집에 가겠다고 우기시는 아버지를 달래, 이번 기회에 치료를 잘 받으시면, 아프지 않으실 거라고. 곧 집에 가실 수 있을 거라고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도 제대로 하시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셨고, 거의 누워 계시기만 했습니다. 의사는 산소포화도를 유지하기 위해 산소를 최대치로 공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병원 측에서 연명치료 문제를 상의하자고 했습니다. 평소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말씀이 있었던 터라, 고심 끝에 연명치료 거부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한 번 더 내려앉았습니다. 이대로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마음에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일찍 병원에 모시고 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부모님이 언젠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 왔기에, 그 후회는 훨씬 크고 깊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시다, 지난 일요일 새벽 운명하셨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간간이 의식이 돌아오실 때면 저와 눈을 맞추시며 무언가 말씀하려는 듯했지만, 끝내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기도를 하시는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셨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기도 소리였습니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드리는 기도, 아마 저를 위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후로 진행된 장례절차,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례식의 문상객이 아닌 상주가 되고 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지난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평소 유언처럼 "내가 죽으면 관에 성경 한 권 넣어달라" 하셨기에, 제가 보던 성경을 넣어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과 죽음, 늘 고민해 왔던 문제지만, 막상 제 일이 되니 많이 흔들렸습니다. 한동안 브런치에 쓰던 글쓰기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쓸 수 있을까요. 지금은 그 의미조차 선뜻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아버지 목소리가 귀에 선하지만, 아버지는 더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 말은 이제부터 제 삶으로 완성해야 할 제 몫으로 남았습니다. 더 책임이 무거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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