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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스며든 향기

희미해지는 것들에 대하여

by 서영수

우리는 지나간 것들을 대부분 잊고 살아갑니다. 어느 맑은 날의 청명했던 공기나, 한때는 견디기 어려웠던 계절의 무게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어느새 흐릿해집니다. 무더웠던 지난여름이 기억에서 사라진 것처럼, 대부분은 그렇게 잊혀 갑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때가 있습니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내 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거나 나도 내 마음을 정확히 모를 때. 무언가를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자신이 없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느끼는 감정적인 혼란은 애써 풀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저 길 위에 놓인 작은 조약돌 같은 것입니다.


하긴, 우리의 선택이 최선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미래를 알 수 없는 인간이 하는 선택이니 판단의 근거는 언제나 현재에 묶여 있습니다. 그 순간의 조건과 이해 안에서 최선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틀린 선택이었다고 밝혀진다 해도, 그때의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후회는 선택의 오류라기보다 시간의 필연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승려 요시다 겐코(吉田兼好)가 1331년 무렵 쓴 『츠레즈레구사(徒然草)』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향기와 같은 것은 한낱 허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잠시 옷에 향이 스며든 것인 줄 알면서도 매혹적인 향기에는 꼭 가슴이 두근거리는 법이다."


칠백 년 전의 글이 지금도 이렇게 선명하게 읽힙니다. 허상인 줄 알면서도 흔들리는 것, 어리석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겐코의 말대로 언젠가 제게도 잠시 스며든 향기가 있었습니다. 향기였으니 영원할 수 없고 곧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사라질 허상이면 어떻겠습니까. 한때나마 그 향기에 취해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요.


아쉬운 것은 점점 그 향기가 희미해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희미해진 채로 어딘가 남아, 어느 날 불현듯 제가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떠올리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지속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렇게 스쳐 지나가면서도 분명히 존재했던 순간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만 맑으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제가 맑지 못하다는 점이지만요.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맑지 않아도, 희미한 채로도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드문 종류의 명료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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