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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소설
"분노거래소"

#1 -  R1: 언덕길, 그녀, 분노거래소



화창한 날씨다. 


이렇게나 기분 좋은 오늘 하루, 나는 내 손과 발에 묶인 쇠사슬을 질질 끈 채 언덕길을 오른다. 덥다. 시원한 얼음이 담긴 음료수 한 잔이 마시고 싶다. 이런 저런 망상을 하며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오늘도 나는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다. 오르면서 생각한다. 도대체 내가 왜 힘든 언덕길을 택하여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평지와 내리막길을 마음껏 달리고, 뛰고, 하다못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데.


그 놈이 생각난다. 


내 안의 잠재되어있는 시커먼 욕망일 수도 있고 학창시절 주구장창 나를 괴롭혀왔던 호리호리하고 야비하게 생긴 족제비 같은 그 놈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깨어있는 매 시간마다 상상의 나래를 내 머릿속에서 펼쳐왔었다. 그것이 때로는 성욕으로, 공포로, 살인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그 부정으로 가득 찬 상상의 나래의 주제는 바로 성공한 내 모습, 그것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고생스럽게 올라간 언덕길을 뒤돌아 바라보니 펼쳐진 숲과 건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언덕길을 마저 올라간다. 나름대로 나 자신과의 싸움 중이다. 주변에 눈들이 쌓여있고 바람만 쌩쌩 불어주면 마치 히말라야를 등반 하는 고독한 탐험대원 같은데. 절로 피식거려진다.


올라가던 도중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행여 오늘도 마주칠지 모르는 ‘그녀’와의 스쳐가는 만남을 위하여 무관심한 척 앞만 보고 걸어가는 척 한다. 과연 오늘도 마주칠까? 채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내 옆으로 긴 생머리의 청아한 그녀가 지나간다. 향긋한 냄새, 단정한 옷차림, 무엇보다 시크하면서도 새침한 표정. 이것이 내가 힘든 언덕길을 일부러 택해 올라가는 이유이다.


손목시계의 초침들이 9와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다 늦겠다. 나는 조금 속도를 올려 부지런히 언덕길을 올라간다. 곧 있으면 평지가 보일거야. 거기서 뛰어가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겠지. 헛된 희망을 품으며 날쌘 좀비처럼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이 썩을 몸뚱이야!


도착했다. 평지가 보인다. 어느새 내 입가에는 목적지에 당돌했다는 안도감에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숨을 가쁘게 몇 번 내쉰 뒤 소매로 입 주위를 닦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보폭은 넓게, 어깨와 가슴은 활짝 핀다. 내가 도착한 이곳, 바로 이름도 생소한 “분노거래소"이다.


※ 분노거래소 Step 1 : 어떠한 분노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분노를 감정해 드리겠습니다. 감정된 분노는
그 희소가치에 따라 높은 금액으로 매입자에게 팔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른 부가비용은 없습니다. 단, 분노를 판다거나 새로운 분노를
얻기 위해서는 한 장으로 구성된 분노계약서를 작성해 주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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