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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Mar 03. 2020

다이소 앞에서 만났던 그녀

시사. 사토리, N포, 여러 사회 장벽을 넘어서는 담쟁이처럼


솔이를 달래주던 중 무심결에 들었다. 아내가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였다. 코로나 확진을 받은 사람들의 연령대를 분석해 본 결과, 20대가 1235명으로 전체 확진자의 29.3%를 차지한다는 것, 50대 확진자인 834명보다 월등하게 많다는 것이었다. 정관용의 시사자키에 출연한 한 패널은 이 통계의 원인으로 신천지 신도의 다수를 20대가 차지하는 부분을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도 인터뷰에서 “신천지교회 교인들 중에 많은 부분을 20, 30대 여성이 차지하고 있어 그 연령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라고 밝혔다.(출처 : http://omn.kr/1mqlu) 문득 몇 년 전 다이소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가 기억났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퇴근 후 아내가 준 쇼핑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인근 다이소에 들렀다. 주차하고 서둘러 건물 내로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가느다랗고 여린 목소리가 저기요 하고 나를 불러 세웠다. 뜬금없는 부름이었다. 아는 목소리도 아니어서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려는데 다시 저기요 하며 조금 더 커진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검은 단발머리에 안색이 창백하고 다크서클이 짙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서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종이 한 장을 주며 억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우리가 이런 문제를 간과하면 안 되지 않겠냐고 하며 안타까움을 토했다.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나 싶어 종이를 슬쩍 봤다. 개신교의 몇몇 목사가 강제로 신천지 신도에게 개종을 요구하며 감금까지 하고 있다, 이 문제는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저해하는 악랄한 범죄 행위이므로 법적으로 규탄해야 한다, 시민들이 이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기존 개신교의 위법 행위를 심판하는 것에 공감해 주었으면 한다 등 다양하고도 강렬한 성토가 담겨 있었다. 신천지로 추정되는 그녀는 그렇게 종이 한 장과 말 몇 마디를 남기고 나에게 떠나갔다. 종종걸음으로 다시 어딘가를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지켜보다가 다이소로 들어갔다. 그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가 신천지의 신도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알 수는 없다. 다만 억울함을 표현하느라 그날 인상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느낌 상 그녀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전전긍긍했으며, 많이 피곤해 보였다. 신천지가 추구하는 십사만 사천 명에 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그녀가 퀭한 눈빛으로 분주하게 신천지 신도로서의 삶을 살아내게 하는 데에는 어떤 동기가 있을까. 그녀와 다시 한번 대화를 직접 나누기 전까지는 평생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녀 만이겠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20대가 신천지에 속해있다. 4년 동안 대구 신천지교회에서 신도 생활을 하다 지난해 탈퇴했다는 A(24세) 씨는 청년들이 신천지에 발을 담그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가 정말 어렵다고 한다. 내면의 상처를 개별 맞춤식으로 정성을 다해 공략하므로 한 번 마음을 주면 계속 의존도가 심화된다. 또한 그 와중에 쌓아놓은 인간관계와 친분, 그리고 그간 신천지 내에서 해왔던 노력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실체를 알더라도 더욱 탈출하기 어렵다. 이 기사에서 부산성시화 운동 본부 이단 상담실 권남궤 실장이 한 말이 내 마음을 깊이 건드렸다. (출처 : https://www.nocutnews.co.kr/news/5300645)

“20대의 경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신천지는 그 부분을 파고든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들어 봤는가? ‘사토리 세대’는 욕망이 없는 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보통 19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현재의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치 깨달음에 도달한 성직자들처럼 소비에 매우 무관심한 경향을 보이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욕도 없기 때문에 ‘득도 세대’라고도 불린다. 아사히 신문에서 제시한 사토리 세대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동차, 명품에 흥미가 없다.
2.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겠다는 의욕이 없다.
3. 도박을 하지 않는다.
4. 해외여행에 관심이 적다.
5. 대도시보다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관심이 많다.
6. 연애에 담백하다.
7.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
8. 독서를 좋아하고 박학다식하다.


딱 이것만 보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추구했던,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스스로 만족하며 검소하게 사는 이상적 삶인 것만 같다. 하지만 일본 내외 사회문제 연구자들은 사토리 세대가 현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앞으로의 생활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사회 구조적으로 거세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즉, 거창한 꿈을 꿔봤자 이루어질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학습했기 때문에 아예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비슷하게 견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N포 세대이다. 결혼, 연애, 집 등 다양한 것을 사회 구조로 인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청년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두 용어 속에서 진득하게 눌어붙은 비애감이 느껴진다. 진취적으로 꿈을 꾸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할 청년들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사회적 장벽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하나둘 포기해가는 일은 참으로 서글프다. 청년의 지속적인 성장이 있어야 대외 경쟁력이 계속 유지되는 국가가 청년의 성장을 저해하는 사회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권남궤 실장의 말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는 미래가 불안하다. 꿈을 꾸고 이루려고 시도했을 때 실패한다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사회가 안전망으로 보장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과연 꿈을 꾸려고 하겠는가. 누가 도전하려 하겠는가. 희망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도 20대 중반, 지독한 열등감 덩어리일 때가 있었다. 졸업하자마자 임용 고사에 패스한 것도 아니고, 집이 부유한 것도 아니었으며 머리털은 그때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잘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저히 앞으로 잘 풀릴 희망도 없어 보였다. 마음이 늘 불안했기에, 생산적인 무언가에 꾸준히 집중하지 못했다. 내적 고통을 회피하려고 순간의 쾌락을 누리게 하는 컴퓨터 게임, 만화, 판타지나 무협 소설만 손에 잡아들었지만 역시 그때뿐이었다. 나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청년이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보면 괜히 가슴속에 부아만 치밀었다. 외제차를 보면 다 긁어 버리고 싶었다.(소심해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아 다행이다) 당시 부모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나를 보듬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평생 따를 수 있는 멘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때를 돌이켜 보았을 때, 이런 상황에서 누가 나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면, 아주 친절히 대해 주면서 삶의 목적이나 동기를 의도된 것으로 자연스럽게 심어줬다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많은 청년들이 신천지에 빠지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다만 사토리 세대와 N 포 세대, 내 주관적인 경험 등으로 미루어볼 때 공통적인 이유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젊은 청년들이 현 사회에서 희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들의 불안감을 달래주고 보듬어줄 이웃도 옆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국회 정책 위원도 아니고, 사회현상 연구자도 아니기에 전문적인 대책을 이 글에서 내놓을 수는 없다.(사실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다) 그저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상황에 공감해보고자 노력해 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안타까운 청년들을 접하면서 마음으로 느끼고 있을 것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불을 지르고자 할 뿐이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누군가의 이웃으로서 상처 입은 젊은 청년들을 위로하는, 그들과 연대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볼 뿐이다. 나 역시 공허하고 희망을 가지지 못한 이십 대의 순간을 살아보았으니까.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희망을 짓누르는 저 장벽을 넘어서는 데 조금은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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