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대치동 학원가, 그 아이들의 삶. 그리고 떠오른 A의 기억
대치동에서 학원 강사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쌀쌀한 바깥 날씨와는 반대로 학원 내에는 겨울 방학 동안 자신의 국어 실력을 향상하고 다음 학년을 미리 준비하려는 학생들의 열기로 몹시 뜨거웠다. A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학원에 다니던 여러 학생들 중에서도 성격이 살가운 편이라 다른 학생보다도 먼저 친해진 아이였다. 그날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다가 A가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무덤덤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당연히 생일 선물을 미리 준비해 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학원의 교무실에 가서 내 책상을 뒤져 봐도 줄 만한 물건도 없고, 그래서 뭐를 주면 그래도 좋아할까, 고민하다가 지갑에 있던 버거킹 할인 쿠폰이 떠올랐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학생이 몰리는 저녁 시간부터는 거의 연강(연이어서 하는 강의)이 대부분이라 저녁으로 제대로 된 밥을 먹기가 힘들다. 잠깐의 여유 시간을 이용해 배달이나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다반사, 그러니 버거킹 쿠폰 같은 것도 나름 나에게는 가치 있는 물품이었다. A가 그 쿠폰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어린 친구들이 햄버거 종류를 좋아하니 선물로 주면 쓸 데가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주섬주섬 지갑 속에 있는 쿠폰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래도 A에게 성의는 보여줬으니 나중에 기회 되면 괜찮은 걸로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A의 반응이 놀라웠다. 예상보다 훨씬 좋아하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버거킹 쿠폰이 그렇게 맘에 드냐고 물어보았다. 그게 그렇게 좋은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서도 나는 ‘버거킹 햄버거를 원래 좋아해서요, 취향이에요.’ 이런 종류의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하지만 대답 또한 의외였다. 이유가 상당히 디테일했다. 그리고 듣고 나서 서글퍼졌다.
샘, 안 그래도 국어 학원 끝나면 바로 다른 학원 가야 하는데,
밥 먹을 시간 부족해서 버거킹 자주 가거든요.
그런데 이 쿠폰 있으면 좀 더 싸게 먹을 수 있잖아요. 좋아요. 헤.
A는 그때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인터넷 뉴스 중 가끔 사교육과 관련한 기사가 나오면 유심히 읽어본다.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교육계의 최신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나 할까. 최근에는 시사IN에서 입력한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아이들의 길밥 보고서>(변진경, 나경희 기자)라는 기사를 읽었다. 제목부터 내가 한 때 근무했던 대치동이 들어가 있으니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대충 예상되었지만 내가 대치동을 떠나온 지 거의 칠 년이 되었기에 현재 그곳 상황을 알고 싶어서 정독했다.
서울 대치동 아이들의 식사는 '길밥'이다. 삼각김밥, 닭꼬치, 카페인 음료 따위가 주식이다. 중계동, 목동 등 학원가가 밀집한 곳은 어디라도 비슷하다.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은 아이들 밥에 무관심하다.
출처 : 사교육 1번지 대치동 아이들의 '길밥 보고서', by. 변진경·나경희 기자, 입력 2020.02.12. 17:28
https://news.v.daum.net/v/20200212172845395?f=m&from=mtop#none
기사는 이렇게 시작해서 성장기에 있는 대치동 아이들이 얼마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공부를 강요당하고 있는지, 좋은 성적과 입시를 위해 인간다운 삶이 어떻게 희생되고 있는지를 강조하면서 마무리한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하나씩 쌓여갔다. 변한 것은 없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누군가 그랬지, 현상 유지는 오히려 퇴보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대치동의 상황은 변한 게 없으니 더 악화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아이들의 성장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은, 그런 삐뚤어진 교육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찬 세계가 더 공고해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잊고 있었던, 대치동에서 만났던 A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이름도, 얼굴도 잊은 지 오래이다.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을 A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내가 모르는 칠 년의 시간 동안 그 아이는 여전한 모습으로 무언가에 쫓기듯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먹어 치운 다음 다른 학원으로 바삐 옮겨갔을까?
내가 대치동 학원 강사를 그만두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A와의 일화는 거기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A의 말은 오랫동안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좋은 선생님의 꿈을 안고 교육자로서의 길에 뛰어들었는데 정작 여기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아이를 양산해 내는 학원가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내가 원하던 교육인가. 나는 아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 아이들을 제대로 길러내고 있는가. 다양한 의문이 내 머릿속을 휘저어 놓았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장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게 하는 비교육(非敎育)에 내가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괴감까지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기억 속의 A에게 말을 건네 본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고.
예전처럼 햄버거 말고도 따스한 밥 냄새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잡곡밥에
구수한 된장찌개는 자주 먹느냐고.
예전처럼 늘 학원 일정에 쫓겨 바쁘게 걷기보다는
도로에 핀 이름 모를 노란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하느냐고.
행복하냐고.
그 어린 A는 내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