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이색적인 연구에서 얻은 교훈
“우리 서울 아파트가 참 사뱡했어”
언론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객관적인 국력 상승과 코로나19 사태에서 본 미국, 일본, 유럽의 어설픈 대처로 인해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음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같이 영국에 유학 온 한국인 친구들은 영국의 낙후된 인프라를 보고 “이게 무슨 선진국이야?” 하면서 놀랐다고 한다. 필자 역시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대학교로 가기 전에 “1451년에 세워진 학교인데 500년 된 기숙사에 사는 건 아니겠지” 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1453년에 백년 전쟁이 끝나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오래된 기숙사는 아니었지만, 밤에 비를 맞고 들어온 필자를 기숙사에서 냉온수 분리가 안되는 구식 수도꼭지와 침실 천장 위 집유령거미 다섯 마리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영국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궁금한 가족들과 페이스톡을 했는데, 필자의 첫 말은 “아, 우리 서울 아파트가 참 샤방했어” 였다. 여러모로 ‘선진국’ 영국을 기대하고 온 나에게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던 영국에서의 첫날밤이었다.
보이지 않던 선진국의 품격
하지만 왜 우리는 그렇게 그 놈의 ‘선진국’을 그렇게 추앙했던 것인가? 그리고 왜 아직도 일부는 추앙하고 있는가? 그리고 도대체 그 놈의 ‘선진국’ 이란 어떤 나라인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국가? 인프라 잘 깔려 있기로는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 세상 어디 내놔도 부럽지 않은 인프라를 구축한 중국도 뒤지지 않는다. 코로나19와 각종 정치경제적 마찰로 인한 반중/혐중 감정을 감안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중국을 동경하거나 추앙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필자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 본 적이 없다. 필자의 주관대로 말하자면, 중국은 앞서 나가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선진’ 적인 면모를 보인적도 없고, 체제 등이나 학계의 관행 등에서도 중국의 뒤를 따르고 추앙하고 싶은 국가는커녕 사람조차 없기 때문 아닌가?
그런 면에서 영국은 최소한 내 분야에선 선진국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을 영국으로 정했었다. 일단 전세계를 알파고 쇼크로 충격받게 한 딥마인드가 영국 기업이었고, 세계 최대의 AI관련 연구소 중 하나인 앨런 튜링 제단 역시 영국에 있다. 소프트웨어 적인 면에서도 영국은 선진국이 분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유학을 시작하려던 2021년에서야 서울대학교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을 개설하였었으나, 글라스고, 버밍엄 등 영국 러셀그룹 대학교에서는 3~4년부터 운영해오고 있었다.
이 기대도 잠시, 학기를 시작하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과목들은 평범한 파이썬 프로젝트, 전 회사에서 혼자 데이터 분석 일을 할 때에 배우던 머신러닝과 Pandas, Numpy 등 파이썬 라이브러리들. 물론 클러스터링 등 몇 가지 머신 러닝 알고리즘을 좀 더 심도 있게 배우기는 했다. 이쯤 되면 사람 건지러 그 비싼 학비를 낸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이야 확실히 건져갔으니까.
의외의 졸업연구
2학기 들어서 ‘심화 과목을 들어보면 뭔가 인상이 바뀌겠지’ 했지만 그다지 변한 것은 없었다. 조교들의 도움이나 실습 등 덕분에 수업을 쫓아가기에는 편해서 영국으로 온 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화학습이나 자연어 처리 등 학계와 산업계 막론하고 가장 인기있는 주제들에 대해서는 조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정말 편하긴 했다. 그나마 ‘이야 이쯤 되야 세계 100대 대학 러셀그룹 명문대지’ 라는 느낌이 들던 수업은 ‘PyTerrier’ 라는 자체적으로 개발해서 운영하는 정보 검색 프레임워크 사용 경험 정도였다. 그 과목 교수가 스코틀랜드 교육청 자문위원이었는데, 그 정도 거물 교수는 필자가 학부를 다닌 한국 학교에도 많았다.
그렇게 무난하게 2학기를 마치고 졸업연구의 시기가 왔다. 우리 School of Computing Science는 연구주제를 학생에게 정해주는데, 필자의 주제는 정말 받자마자 기분이 묘했다. RPGLite 라는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자체개발한 모바일 게임 로그 데이터를 가지고 데이터 분석을 해 보라는 과제였다. 게임 자체는 특별한 건 없었다. 두 플레이어가 전사, 도적,마법사, 궁수 등 흔한 서양식 RPG 에서 볼 법한 직업 8개중 2개를 골라 먼저 상대팀을 쓰러뜨리면 되는 간단한 게임이다. 단지 이 게임이 만들어진 목적이 특이했을 뿐이다.
단순히 게임 내의 ‘Competitive Balance’를 AI를 활용해서 조정해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Competitive Balance’란 우리 에게는 단순한 ‘밸런스’ 라는 개념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 설명하자면, 왜 가위바위보 게임에서는 가위 바위 보가 다 비슷한 선호도를 보일까? 세 옵션 모두 동일한 확률로 이기고, 지고, 비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위, 바위, 보’ 가 ‘전사, 도적, 마법사’ 같은 복잡한 개념들로 변하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마법사는 전사가 접근하기 전에 마법으로 튀겨버리고, 도적은 마법사가 주문 영창을 하기도 전에 찔러 죽이고, 전사는 도적의 단검은 판금갑옷으로 씹으면서 힘으로 뭉게버린다’ 라는 가위바위보식 설명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전사가 대마법 보호막을 쓴다면? 도적이 방어구 관통 무기를 든다면? 마법사가 미래예지로 등 뒤의 도적을 튀겨버린다면? 게다가 요즘 복잡한 게임들에는 ‘야만용사’, ‘닌자’, ‘드루이드’ 같은 좀 더 복잡한 개념들도 나온다. 만약 야만용사가 전사급 전투력과 도적급 기동력을 가지면 전사와 도적이 실업자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어떻게 게임을 조정해야 하는가? 이런 개념들을 학구적인 차원에서 AI같은 최신 기술을 동원해가면서 연구하던게 내 전임자가 하던 연구였다.
필자 역시 게임을 좋아하고, 이스포츠도 자주 챙겨보고는 했다. 그냥 게임, 애니, 스포츠, 격투기 등 ‘남자들 좋아하는 거’라면 다 환장하는 진성 남성향 오타쿠다. <스타크래프트>가 한창일 때는 외국에 살아서 피시방 문화를 그닥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가 활성화되었을 때에는 한국인에게 게임이란 뭔지 체험해보았다. 인벤이니 엔하위키니 하는 사이트들이 활성화되어서 밸런스 관련 담론도 활발해졌다. 필자 역시 학부때 친구들과 피시방 다닐 때에는 이런 대화를 즐겨 하고는 했다. 새 패치가 나오고, 큰 대회가 열릴 때마다 대화의 주제는 항상 게임이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된 필자에게 ‘게임' 이라는 주제는 약간 좀 ‘어려 보이는' 주제였다. 직장 다니면서는 롤 패치노트가 어쩌고 하면 주변의 따뜻한(?) 시선은 물론, 그런 대화를 할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다.
학문적 호기심의 가치
그래서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다른 친구들은 이중언어 검색 시스템(‘손흥민’ 과 ‘Harry Kane’을 쳤을 때 어떻게 정보를 검색하는지)이나 요즘 인기있는 자율주행차 같은 하이테크 해 보이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비교적 ‘없어 보이는’ 연구인 ‘AI를 활용한 시험 스케줄링’ 역시 AI 연구계에서는 인기있는 주제인 강화학습을 응용한 거라 필자의 연구가 부족해 보였다. RPGLite는 2020년에 서비스 종료해서 강화학습을 하고 싶어도 할 게임 본체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연구가 기술적으로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혁신적인 사실도 아니지만 필자에게는 많이 와 닿았다. 프로게이머, 게이밍 팀과 게임 개발사가 아니라 학계가 게임 속 밸런스 같은 이슈를 다뤄 주고, 데이터로 유저를 알아보는 연구를 통해 추후 마케팅이나 개인화 추천, UX/UI 개선, 인간컴퓨터 상호작용에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연구에 임했다. 실제로 이 연구는 게임 개발론에 대한 추후 연구에 사용될 거라는 말도 들었다. 실제로 영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GTA>시리즈와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의 락스타 게임즈는 물론, 독특한 게임성으로 충성스러운 매니아층을 확보한 <Football Manager> 시리즈와 <Total War> 시리즈의 개발사들도 있는데, 학계에서 이런 토픽들을 고찰하고 온 개발자들이 저런 게임들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필자의 주제는 처음에는 '게임을 잘 하는 건 어떤 것인가' 였다. 각 플레이어 클래스에 대한 이해도라던가 (실제로 RPGLite 에서 상위권 플레이어들은 조건만 맞춰주면 상대를 쉽게 척살하는 도적이나 야만용사의 채용도가 높았다), 플레이어 개인의 운영 방식이라던가 등을 수치 데이터로 보았다. 연구를 하다 보니 ‘플레이어 피로’, ‘잘못된 직업 설계’ 등을 수치 데이터만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치유사 클래스가 선호도가 낮았던 건 성능도 애매한게 게임을 2~3턴씩 강제로 늘려버렸기 때문이다. 연구가 종료될 즈음, 필자의 이런 정성과 노력이 교수에게도 와 닿았는지, 연구가 종료될 즈음에 교수도 ‘impressed’ 라는 피드백을 보내왔다.
필자가 유학을 오기 전에 한국에서 (게이머로서는)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임의 과금 모델에 지친 사용자들이 트럭을 보내서 항의하는 ‘트럭 시위’가 한창이었고, 최근(2022년 10월) 기준으로도 카카오게임즈의 운영 미숙에 ‘마차 시위’로 진화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포츠에는 금년(2022년) 롤드컵 4강에 우리나라 팀이 셋이고, 한국팀간의 결승전을 확정지을 정도로 눈부신 성과를 내는 나라가 게임산업에서는 운영미숙, 과금 대비 재미 부족 등으로 곪아가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다. 게이머를 단순 유사 아이돌/유사 스포츠 스타 내지 돈줄로 취급하는 대한민국의 풍토가, 최소한 고객으로 대우하고 이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 게임사들과 너무 대조되어 보였다. 어벤져스보다 돈 많이 번 <GTA>시리즈는 언급할 것도 없다. <Total War> 시리즈가 국산 온라인 게임보다 돈을 못 버는 건 사실이지만, 올해 35년을 맞은 <Total War> 보다 장수할 국산 IP가 있을까? 게임이 음악, 영화보다 산업규모가 큰 만큼, 진지한 연구를 해본 본인으로서는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어찌보면 영국이 쇠퇴했다고는 해도, 학계나 컨텐츠 등 첨단산업에서 그 위상을 지킬 수 있는 게 이런 학문적인 호기심이 아닌가 생각한다. 넷플릭스 등 OTT와 스팀 등 전자결제망으로 대표되는 파편화된 현대 대중문화계는 이제 특정 고객층을 겨냥해서 노리지 않으면 성공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프리미어리그, 방탄소년단, <귀멸의 칼날>, <리그 오브 레전드> 가 아무리 대중적이라 해도 신경 끄는 타겟 밖의 사람은 1도 신경 안 쓰는 게 현실이다. 이는 본인만의 생각이 아니라,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3> 에서 '평균 실종', '나노 사회' 등의 키워드로 주목하고 있는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그 책에서는 '디깅 모멘텀'(덕질)과 '네버랜드 신드롬'(피터팬 증후군) 을 언급하며 우리가 '유아적'이라고 생각하는 게임, 애니메이션, 팬덤(스포츠, 연예인 등)의 영향력이 커질거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불편하든, 인정하든, 이는 이제 학계에서도 인정 받고 서점에서도 팔리는 진실이다.
덕질의 생산성이나 많은 30대, 40대가 성숙하지 않는 '피터 팬' 이 된다는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왈가왈부는 다루지 않겠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 데이터 사이언스 등 최신 학문을 접목하여 어떤 게임이 어떤 사람을 어떻게 낚는지, 왜 유저들이 하다 말고 떨어져 나가는지. 이런 재미 요소에 대해 학계에서 앞서서 이익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최소한 관련 분야에서는 영국에게 선진국, 세계를 선도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국가의 위상을 증명하는 셈이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고, 추후 산업을 선도하는 국가와 기관은 미래산업에 대해 학구적인 자세로 접근하는 자가 아닐까?
양국남자
91년생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University of Glasgow MSc Data Science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