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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자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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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Nov 16. 2015

기특한 똥

더럽게 귀여운 이야기

유자가 배변 패드 근처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하면 칭찬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신중한 자세로 제자리를 맴도는 유자는 곧 응가를 하기 때문이다. 따끈한 응가를 바닥에 떨군 후, 유자는 언제나 사람이 있는 쪽으로 뛰어온다. 언제나 해맑은 표정으로. 어릴 때 배변훈련을 하면서 화장실에 제대로 용변을 보면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줬는데,  그때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나 보다. 배변훈련이 잘 끝났는데도 칭찬은 계속되고 있다. 볼 일을 보고 칭찬받으러 뛰어오는 유자를 보면 우리 엄마는 항상 말한다. “똥 싸고도 칭찬받는 건 유자밖에 없을 거야.”     

개들도 수치심이 있어서 배변활동을 할 때는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알고 있는데, 유자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응가 포즈를 취하고 화장실 주변을 맴돌다가 가끔 나랑 눈이 마주치기도 하는데, 유자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내가 똥 싸는 걸 잘  봐’라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그럴 땐 미리 간식을 하나 쥐어들고 유자를 기다린다. 어김없이 해맑게 뛰어오는 유자 입에 간식을 물려주고, 나는 유자 화장실로 간다.      


조선 시대 내시가 임금님 매화를 살피듯이 유자 똥 앞에 쭈그리고 앉아 변의 상태를 살핀다. 적당히 단단하고 윤이 반질반질하게 날 때는 개똥을 줍는 마음이 뿌듯하다. 반대로 냄새가 심하거나 너무 질척한 변을 본다면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어느 경우도 더럽다는 마음은 크게 들지 않는다. 참 웃기는 일이다. 다른 누구의 변이라고 해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데, 유자만은 예외다.      

신중하게 임시 화장실 자리를 고르고,
배변 성공 세리머니!

밖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적당한 곳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뱅글뱅글 돌다가 일을 보는 것까지는 똑같다. 하지만 시원하게 똥을 누고 나서도 칭찬을 받으러 뛰어오진 않는다. 대신 주변의 나뭇잎이나 흙을 뒷발로 팍팍 차올린다. 집에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라 그런지 아주 신나 보인다. 말로만 하는 칭찬 따위 밖에선 필요 없을 법도 하다. 가끔은 너무 신나게 뒷발을 놀려서 똥을 어딘가로 날려버릴 정도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똥 치우는 일은 사람의 몫인데, 유자는 그런 고충 따위 안중에도 없다. 그게 맞는 일이기도 하다. 유자에게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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