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쪽이 좋다
기어이 울리고 말았다. 집으로 뛰어가던 여자애가 유자 때문에 울었다. 달려오다가 유자를 보고 멈칫거리길래 '개를 무서워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허리를 숙여 유자의 목줄을 짧게 잡는데 아이가 유자 옆으로 뛰어갔다. 주인이 잡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 틈에 상황을 빨리 모면해보려고 한 모양이다. 겁먹은 대상을 주시하던 유자는 약한 상대방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짖는다. 아이가 용기를 내서 첫 발을 뗀 순간부터 앙칼지게 짖었다. 우리 옆을 뛰어가던 그 순간이 불쌍한 어린 친구에겐 엄청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쪽으로 뛰면서 우애앵- 긴 울음소리를 남겼다. 미안했다. 유자는 왠지 의기양양해 보였다.
같은 개한테도 마찬가지다. 작은 강아지들을 만나면 사나워진다. 어린 강아지를 놀래켜서 상대 견주한테 미안했던 적이 종종 있다. 자기보다 어리거나 나이가 아주 많으면 정도가 더하다. 한때는 그걸 나름의 용맹함이라고 생각했는데, 덩치가 크거나 자기보다 활발한 녀석들 앞에서는 바짝 얼어있는 걸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여간 유자 앞에서 쫄아있는 모습을 보이면 다음 순간 더 곤란해진다.
유자는, 두려움의 냄새를 맡는 것 같다. 개든 사람이든 상대가 자기를 겁내는 기색이 보이면 더 달려든다. 더 사납게 짖으며 들이댄다. 겁내던 상대방은 뒤로 물러나고 우리 못난 개는 더 더 목청껏 짖는다. 자기도 무지하게 겁이 많으면서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겐 상당히 가혹한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유자가 이빨을 들이대도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유자의 약점인 '귀 닦기'를 들먹거린다. 그러면 귀 닦기 싫어서라도 얌전해지니까.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니. 유자는 진짜 성격이 나쁘다.
하지만 남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게 꼭 유자뿐일까. 사람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다들 마음의 약한 부분을 잘 가리기 위해 애쓰며 산다. 자신감이 부족한 부분과 깊은 상처로 남은 부분을 아무데서나 드러내지 못하는 건, 그것이 곧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약점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며 얼레리 꼴레리 노래를 부르는 어린애들을 보면 '약점 공략'이 동물적 본능인가 싶기도 하다. 다 함께 서로의 약점을 보듬어주며 살면 좋겠지만, 역시 불가능한 상상이다. 스스로 약점을 보완하고 강해지기도 어렵다. 약점은 약점인 줄 알면서도 떨쳐낼 수 없다.
나의 약한 부분은 스스로 잘 감추고 보호하다가 믿을 만한 상대를 만났을 때만 살짝 공유하는 게 최선이다. 그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고 어렵기 때문에 성공했을 때의 기쁨은 더 크다. 유자는 이런 문제를 신경 쓰지 않겠지만, 유자의 보호자 중 한 사람으로서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약한 모습도 마음대로 보일 수 있게.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오히려 유자에 얽매인 나의 마음은 약점을 하나 더 갖게 된 셈이지만, 괜찮다. 어쩔 수 없는 약점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겨나는 약점은 그래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