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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Oct 17. 2022

우리 아시안들

수업시간에 경험하는 타자화된 우리 아시아와 세계의 중심 그레이트 아메리카

아시아는 서양의 반대편에 있는 타자로서만 존재하는가? 40년도 더 된 이 오래된 질문, 학부시절 사회학과 수업에서 배웠던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태국에서 동남아시아학을 공부하며 매일의 수업시간에서 떠올린다.


내 전공은 정확히 ASEAN Studies for Sustainable Development로, 학생들 대부분이 주변 아세안 국가에서 왔다. 코로나 전까지는 조금 더 다양한 국적의 동남아시아 및 중국 학생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여덟 명의 신입생 중 다섯 명이 미얀마 출신이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명이 각각 한국, 홍콩, 미국 국적이다.


미국 학생은 중년의 백인 남성이다. 아세안이 설립되었던 1967년에 1살이었다고 하니 그는 50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원래 샌프란시스코 출신이나 하와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의 말에 따르자면) 많은 미국인들처럼 몇 번의 커리어 전환이 있었으나 현재 직업은 교사다. 일본, 한국, 홍콩, 태국에서 영어교사로 일한 적이 있어 아시아 문화에 익숙하다. 그의 아내는 40대 초반의 태국 여성이며 그들 사이에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있다. 그는 몇 주 단위로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방콕을 오가며 산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수업시간에 본인의 입으로 얘기한 것이다. 그는 ‘sharing’을 사랑한다. 오늘 네 시간 연강인 수업에서 그가 두 번에 걸쳐 혼자 ‘쉐어링’한 시간을 합해보니 50분이었다.


모든 수업의 교수님들이 그의 말을 경청한다. 때론 다른 어느 학생들보다 더. 그의 말에는 무게가 실리고 교수들은 ‘미국의 사례’를 ‘쉐어링’하는 그에게 호의적이다. 그가 교수님들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기 때문일까? 연장자를 공경하는 ‘우리 아시아’의 문화 때문일까?


오전 수업은 아세안의 교육이 주제였는데, 교수님은 계속해서 ‘아시아 학생’, ‘아시아 교육’을 ‘서양’의 ‘선진적’인 교육에 대비되는 열등한 것으로서 설명했다. 그러다가도 “홍콩이나 한국처럼 선진국(developed Country)의 상황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아세안 국가들에서는…”이라며 아시아 내에서 상대적으로 GDP가 높은 나라들을 ‘아시아의 서양’처럼 보기도 했다. 아세안 국가들을 한데 묶어 얘기하기엔 싱가포르와 캄보디아, 인도네시아와 미얀마의 격차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우리 아시안들은 토론에 약하고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그래. 와중에 미국 학생은 미국에서는 대학 등록금이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고등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은 반면, 자신은 누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아시안 밸류’를 귀하게 여기고 실천하려고 한다고 했다. 일본, 홍콩, 한국에서 일해봤기 때문에 아시아 학생들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우수한지 안다고도 했다.


동남아시아의 관점으로, 그러니까 식민주의자들의 눈이 아닌 당사자들의 시각으로 이 지역을 공부하고 싶어 태국으로 왔는데, 실제로 내가 교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선명하게 타자화된 동남아시아, 열등감에 시달리는 동남아시아다. 교수님의 강의에서도 내가 읽는 논문에서도 아세안 조직은 끊임없이 EU와 비교되고 부족한 것들 투성이다. 태국이 아니라 싱가포르를 택했다면 달랐을까?라고 잠시 생각해봤는데, ‘작은 영국’으로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겠다는 생각이 1초 만에 들었다. 그리고 이건 전세계 어딜 가든 비슷하리란 것도. 이것 또한 공부하면서 얻을 수 있는 시선이라 여기고 관찰자적 입장에서 수업시간에 일어나는 역동을 흥미롭게 지켜보려 한다. (미국 학생이 TMI TMT 하는 건 좀 짜증 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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