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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Apr 12. 2023

햇볕 아래 행복하다는 느낌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다가 문득 나의 집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백수린 작가에게 언덕 위 '작고 환한 방'이 있었듯, 내게도 볕이 쏟아져내리는 집, 혹은 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는 내 안식처가 있었다.


동선동 집에서 4년을 살았다. 처음으로 전세계약을 한 집이었다. 아주 작은 집이었지만 큰 창이 두 개나 있었고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창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내가 가진 가구들 중 가장 비싼 원목 책상을 놓았다. 그 식탁 겸 책상에 앉아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나의 작고 귀여운 첫 책도 만들었다. 하루종일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날이면 해가 어디에서 뜨고 어디로 지는지 한눈에 보였다. 한낮의 태양이 서서히 지고 어스름이 내릴 때쯤엔 창밖에서 찌개 끓는 냄새가 났다. 주말 낮에는 인근 학교에서 아이들이 공 튀기는 소리, 간간히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눈이 펑펑 오던 겨울날이면 그 책상에 앉아 앞집과 옆집 건물 지붕이 하얗게 물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요가 매트 하나 놓을 자리도 부족할 만큼 아담한 크기의 집이었지만, 나의 안전가옥에서 나는 충분히 충전하고 휴식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집과 관련한 특별한 애착은 없다. 기억할 수 있는 유년기부터 독립 전까지 살았던 집을 어림잡아 세어보니 열 군데 정도가 되는 것 같다. 조금 정이 들만 하면 이사를 갔던 터라, 한 집 혹은 한 동네에 줄곧 살며 초등학교 동창생과 오래도록 만나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내게는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졌다. 이사를 다니는 동안 방의 개수는 늘었다가 줄었다가를 반복했고, 신도시와 구도심, 신축과 구축을 오갔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면 모두 아파트였다는 것인데, 그건 한국의 많은 이들처럼 내 부모도 집을 주거 목적보다는 투자 가치로 보는 관점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 많은 이사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고, 대개 그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의 원인이 되곤 했다는 것이었다. 아직 새 가구가 도착하지 않은, 이전 집보다 훨씬 넓어진 신축 아파트에서 다투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텅 빈 집의 벽 6면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울리던, 여덟 살이 된 그 해의 여러 밤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기대로 들뜨고 설렜던 이삿날도 없진 않았다. 신도시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간 첫날이었다. 그 전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없었던 최신식 카메라가 달린 인터폰이 있는 집이었다. 띠라리라 리라리라라. 집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경쾌한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 집에 이사한 첫날, 가족들은 순서대로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인터폰을 받아 "암호를 대시오" 같은 놀이를 하며 즐거워했다. 후에 그 인터폰은 고장이 나서 엘리제를 위하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그리고 나는 '나를 위하여' 집보다는 학교나 학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취업과 함께 독립했다.


지금 살고 있는 태국 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다. 침실과 작은 거실, 부엌, 그리고 세탁기가 있는 작은 발코니룸이 있는데, 침실의 창으로 일광욕을 할 수 있을 만큼의 햇볕이 들어온다. 집 안을 환하게 밝히는 그 빛 아래 있으면 이따금 찾아오는 내 불안들은 먼지처럼 공중에 흩어져 분해된다. 나는 창가에 널어둔 빨래처럼 소독된다. 내 안의 작은 걱정과 얼룩들은 햇볕으로 바짝 말라 깨끗해진다. 나는 식물처럼 일조량에 따라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풀 죽어 시들기도 한다. 기분은 날씨 같은 거니까, 오늘 조금 흐렸다고 내일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는 걸, 내 안전한 집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한다.


폭우처럼 햇볕이 쏟아지는 집 안에 앉아,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따뜻하고 섬세한 작가의 다정한 문장을 읽는 지금. 나는 햇볕 아래 행복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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