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친구의 아는 사람 집에서 친구에게 얹혀살기
어쩐지 훠궈집과 양꼬치집이 많은 동네였다. 우리는 몰랐었다. 신길과 봉천에 어떤 특별한 의미, 혹은 계급이 부여된다는 걸. 양꼬치와 칭따오를 좋아하는 우리에겐 그저 동네 맛집이 많아 좋을 뿐이었다.
청파동-탄자니아-북창동을 거쳐 다음으로 간 곳은 신길동이었다. 북창동 고시원에서의 한 달, 그러니까 인턴 생활 한 달이 끝난 뒤 나는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이놈의 회사는 공무원도 아닌데 기약 없이 발령날만 기다리라 했다(결국 나는 4개월 동안 미발령 상태였다). 그 나이에 집에다 손을 벌리기는 뭣하고, 그렇다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는 더 싫었다. 어떻게든 서울에서 비빌 언덕을 찾아봐야 했다.
운 좋게 친구의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질 수 있게 되었다. 친구(K)의 친구(J)가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을 가게 됐는데 계약기간이 남아있었던 덕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막 일을 시작한 친구(K)가 월세만 내고 그 집에서 살기로 했고, 나는 염치 불구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J의 집에서, 친구 K와 함께 살기로 했다. 얹혀사는 친구에게 또 빌붙는 나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이었다.
신길 라이프는 길지 않았다. 3개월 후 계약이 만료되면서 우리는 새로운 집을 찾아야 했다. 이번엔 친구 K의 또 다른 친구의 지인, 그러니까 세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의 집이 또 우연히 비게 되었다. 역시나 갑작스러운 해외 발령 덕분이었다. 봉천역 근처의 오피스텔이고 계약기간은 4개월 정도가 남아있다고 했다.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신길과 봉천 집은 모두 6평 남짓한 원룸이었다. 옷장과 책상, 싱글 침대를 빼면 바닥에 앉을 공간조차 제대로 없는 수준이었다. 수족관의 돌고래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시간이었다. 좁은 수족관 안에 있는 돌고래는 자기 음파가 벽에 부딪혀 돌아와 종일 소음에 노출된 것과 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했다. 나는 돌고래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몸이 여기저기 모서리에 자주 부딪히곤 했지만, 초음파 공격을 받지는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게다가 고시원에서 살다 왔으니 기준이 아주 낮아 이정도면 숨통 트인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유엔난민기구가 제시하는 난민캠프 운영계획 기준(Camp planning standards)*에 따르면, 난민 캠프 내 1인당 평균 거주 면적 기준은 45평방미터, 그러니까 약 13평이다. 이 중에서 30평방미터는 도로, 교육시설, 식수 위생 시설, 구호 물품 보관 등을 위해 필요하며, 나머지 15평방미터는 정원이나 텃밭용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난민캠프도 아닌데. 아무리 공용공간을 포함한 전체 면적을 1인 기준으로 나눈 것이라 해도. 우리에겐 정원이나 텃밭도 없는데. 캠프 난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1인당 13평을 권고하는데. 우리는 텃밭만 한 데에서 두 명이 먹고 자고 싸며 살았다. 우리는 싱글 침대에서 함께 자고, 오피스텔 1층의 편의점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야식을 먹었다. 진정한 우정이 싹트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언제 날지 모르는 발령을 기다리느라 아르바이트 조차 시작할 수 없었던 나는 땡전 한 푼 없는 상태였다. 친구 K가 월세와 생활비 모두를 부담했다. 나는 그런 친구를 '바깥양반'이라 부르며 친구가 출근하고 나면 (그 좁은 집에서) 청소와 빨래, (아주 가끔) 간단한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전업주부 체험이라니. 전업주부 돌고래 체험이라니. 인생에 다시 못할 소중한 경험이었다.
7개월간 돈독한 우정을 쌓은 K와 나는, 이후 본격적으로 새로 살 집을 (또) 찾아 나서게 된다. 나의 꿈은 소박했다. 그저 침대를 하나 더 놓을 수 있었으면, 싱크대 찬장이 - 싱크대 찬장 색깔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 흰색이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바람은 신림 라이프로 이어졌다.
*참고: https://emergency.unhcr.org/entry/125657/camp-planning-standards-planned-settle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