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에 진심인 태국의 대학병원
요즘 나의 즐거움 중 하나는 병원에 가는 것. 골반에서 무릎까지 이어지는 장경인대가 타이트해지면서 발생하는 무릎 통증 때문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2주에 한 번씩 학교 대학병원에 가고 있다. 대학병원의 복잡한 접수와 수납 시스템, 예약을 해도 필수적으로 대기하게 되는 상황 때문에 처음엔 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꽤 익숙하게 병원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재학생은 대학병원에서 일정 금액범위 내에서 전액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태국 현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왕자의 이름을 따 설립된 (의대에서 출발해 종합대학이 된) 이 학교의 장점을 누리고 있다.
이 병원이 재밌는 점은 ㅁ 자로 생긴 건물 한가운데에 먹거리와 생필품을 파는 작은 시장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야시장의 나라! 시험기간에 도서관 앞에 푸드트럭이 오는 것에 놀랐었는데, 심지어 병원에도 야시장 바이브의 미니 장터가 있다. 한국 사람들이 밥에 진심이라고 하지만 태국이야 말로 어딜 가든 먹을 것이 넘쳐나서 밥 걱정이 필요 없다. 천막 아래 자리한 각종 국수, 밥, 디저트 가게들이 환자와 의료진을 위한 먹거리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방콕 중심의 신축 사립병원은 이런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대학병원의 장터는 분명 환자와 의사들을 즐겁게 해 준다.
병원 행이 내 소확행이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병원 가는 날엔 치료 효과보다도 '오늘은 끝나고 뭐 먹지? 뭐 사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우선 이 병원은 과일 맛집이다. 집 근처 마트에서는 잘 팔지 않는 싱싱한 과일이 병원 안 과일가게에 널려있어 눈과 코가 즐겁다(샤인머스캣도 있다!). 지난번에는 망고스틴과 롱안을 사 왔고, 이번에는 골드키위와 드래곤프룻을 가지고 왔다. 과일집 옆에는 유기농 채소가게도 있는데, 백화점 지하 식품관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라 표고버섯과 방울토마토를 사 왔다. 과일 쇼핑을 한 뒤에는 별도의 푸드코트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태국식 디저트나 중국식 퓨전 간식을 2차로 먹는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앤 이모의 프렛즐' 가게에서 갓 구워 나온 프렛즐을 사서 양손 가득 바리바리 비닐 봉다리를 들고 병원을 나온다.
또 하나 병원에 가는 것이 재밌는 이유는 물리치료실에서 듣는 태국어의 향연 덕분이다. 사실 태국에 살고는 있지만 태국어의 언어적 자극이 매우 적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데, 병원에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가 태국어 듣기 평가다. 일단 내 이름이 불리는 걸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시작이다(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도 쉽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겠지..). 0개 국어로 접수를 마치고 물리치료실 베드에 누우면 그때부터는 컬러풀한 태국어가 사방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누운 양쪽 베드의 환자와 물리치료사 선생님의 대화부터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 환자를 호명하거나 다른 선생님을 찾는 소리("선생님 14번 베드 끝났어요"), 선생님들끼리 나누는 농담과 각종 감탄사들("오~이~!") 치료실 티브이에서 나오는 드라마나 뉴스 소리 등등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태국어가 들린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그중 5퍼센트도 될까 말까지만, 담당 선생님들의 가르침 덕분에 "괜찮으세요? 아파요? 땡겨요?" 같은 물리치료에 특화된 태국어를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무릎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처음엔 걷기도 불편할 만큼 심하게 시큰거려서 관절이나 연골에 문제가 있는 건 줄 알고(이 나이에 ㅠㅠ) 무서웠는데, 역시 만병의 근원 장시간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과 골반 불균형 때문이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태국에 오자마자 냄비와 밥솥보다 요가매트와 폼롤러를 먼저 살 정도로 스트레칭에 진심이지만, 허리가 괜찮으면 무릎이, 무릎이 나아지면 어깨와 목 통증이 시작되는 식으로 신체 부위가 돌아가며 고장 나고 있는 건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조금 슬퍼지려 하지만 내 건강에 대한 절대 불신에서 비롯된 습관적 병원행과 늘 기운은 없지만 막상 큰 병은 없는 '골골백세' 체질로서 논문 마지막까지 조이고 닦고 기름칠하며 잘 넘기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