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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위밍 Apr 22. 2024

태국 대학원생 근황토크 (1)

태국에서 2년 살면서 느낀 점 풀어본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가 끝나간다. 2022년 7월에 태국에 왔으니 곧 있으면 만으로 2년을 채우게 된다. 졸업을 제때 못하고 5학기를 다니게 될 가능성이 있어서(오히려 좋아?) 하반기에는 내가 어디에 있을지 아직 아무 생각이 없다. 요즘은 논문을 쓰느라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2월에는 논문 때문에 현장조사를 하러 라오스에도 다녀왔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쓰도록 하겠다(미루리 미루리라). 3-4월은 매일 책가방 메고 방콕 곳곳의 카페와 무료 코워킹 스페이스들을 찾아다녔는데, 이것도 날 잡아서 한번 정리하도록 하겠다(미루리 미루리22).


내가 가는 도서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라 나는 자체적으로 일, 월을 쉬는 날로 정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쉬는 날이다! 종일 공들여서 (영어로) 문장을 쓰는 일에 힘을 쏟고 나면 밤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유튜브만 보게 된다. 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 마음 먹지만 워낙 타고난 에너지 레벨이 낮기도 하고 한 번에 하나 밖에 못하는 성격이라 쉽지가 않다. 게다가 브런치는 뭔가... 완결성 있는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내심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거의 6개월 가까이 브런치를 방치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뭐라도 좀 찌끄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노트북을 들고 전망 좋은 카페로 왔다.


이런 에너지가 있는 날은 흔치 않으므로 지난 2년 동안 여기서 살고 공부하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를 짧은 메모로 정리해보려 한다. 사실 하나하나가 개별 포스팅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내용들이지만 그렇게 쓰려고 하면 나는 또 부담을 느끼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단 써본다.


1. 'One of them'이 되는 것의 편안함


태국, 아니 방콕에서 사는 동안 가장 좋았던 건 내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나는 소수자성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20-30대 여성들의 차림새는 한국이나 태국이나 큰 차이가 없고, 특히 방콕처럼 큰 도시에서는 군중 속에 섞여 살 수 있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큰 안정감을 준다. 워낙에 외국인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내가 백인이나 흑인이었다 하더라도 아마 그렇게까지 시선을 받지는 않았을 것 같다. 10년 전에 탄자니아에서 살았을 때나 최근까지 아프리카 국가들로 출장을 갔을 때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다. 누군가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쉽게 친구가 되고, 즐기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 움직이는 '동네 슈퍼스타'의 삶이 내내 편치 않았다. 단순한 호기심일 때도 있었지만 나를 놀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칭총"거리며 내 뒤를 졸졸 좇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도 흔했다. 이건 안전과도 직결되는데, 말하지 않아도 '그 동양인 여자애'가 사는 곳을 작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삶이란 늘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이렇게 큰 방콕이라는 도시에서 익명의 1인으로 살 수 있다는 건 큰 안정감을 주었다.


2. K-라는 베네핏


평소에는 그저 아시안으로 살다가도 어떤 상황에서는 국적을 밝혀야 하기 마련이다. 택시 기사 아저씨의 '웨알유프롬?'에 답하는 것부터 수업시간에 나를 소개하거나, 단골 카페 아르바이트생과 스몰토크를 하거나, 집 계약을 위해 공인중개사에게 내 신분을 밝혀야 할 때까지, 다양한 상황에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동남아'는 피부 톤이 어두운 사람들을 낮추어 부르는 멸칭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한국'은 세련되고 선진적인 것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내가 "마짝 까올리(come from Korea)"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은 반가워하며 열 번 중에 아홉 번 정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K-드라마와 K-POP 그룹을 언급한다. 수업시간에 경제발전이나 문화산업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많은 교수님들이 나로부터 한국의 사례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물론 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최고 자살률과 최저 출생률 같은 얘기를 했지만...). 학생들이 모이는 행사의 배경음악은 무조건 K-POP이고, 쇼핑몰에서 열리는 댄스 경연대회에서는 모든 참가팀들이 K-POP그룹의 춤을 춘다(과장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실제다). 내가 22년 7월 중순에 오자마자 곧 뉴진스가 데뷔했는데, 8월 초 개강 후 학생회관에 갔더니 학생들이 뉴진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 챌린지 영상을 찍고 있었다. 얼마 전에 데뷔한 아일릿의 노래도 지금 방콕 쇼핑몰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같은 과 미얀마 친구들은 나에게 자주 한국 화장품을 추천해 달라고 묻고, 넷플릭스에 새로운 시리즈가 업데이트되자마자 나보다 더 빨리 보고 감상평을 나눈다.


처음엔 이 상황이 신기함을 넘어서 조금 기이하게까지 느껴졌다. 내가 특정한 국적이라는 사실만으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호감과 호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마찬가지로 10여 년 전 탄자니아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았기에 나는 언제나 (거대한 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표현인) '치나'(스와힐리어로 중국, 차이나) 중의 한 명으로 존재했다. 탄자니아에서(도) 중국인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은 편이라, 국적을 밝히지 않으면 이미지가 안 좋은 중국인으로, 밝히면 '듣보잡'인 한국인이 되는 진퇴양난에 놓이곤 했다.


나는 학생이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치지만 만약 사업을 하는 상황이라면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질 것 같다. 실제로 나도 라오스 출장에서 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이 출장팀과 셀카를 찍으려고 줄을 서있는 진풍경을 경험하기도 했고(그 동료가 좀 K-스타일 훈남이긴 했지만..),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전히 이 상황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타국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큰 이점임인 것만은 분명하다.


3. 태국 친구는 없지만 미얀마 친구는 많다


태국에서 학교를 다니지만 태국인 친구가 없다. 딱 한 명 있는데 그것도 학교에서 알게 된 게 아니라 우연히 내 친구의 일본인 지인이 아는 태국인 친구의 친구라는, 아주 복잡한 경로를 거쳐서 겨우 한 명 있는... 무튼 학과가 설립된 지 6년쯤 되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태국인 학생은 없었다고 한다. 그럼 누가 여기에 오느냐? 대부분이 미얀마 출신이고 일부 중국 학생들도 있다. 이건 우리 과뿐 아니라 다른 인터내셔널 프로그램도 비슷한 상황이다. 미얀마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다음이 중국, 그 외 기타 인도, 네팔 같은 서남아시아, 그리고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같은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학생들도 있지만 자국의 교육 수준이 더 높기 때문에 여기로 오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같은 학번 동기가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인데, 그중 세 명이 미얀마 국적이고 다른 한 명은 홍콩 출신이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미얀마에 대해 알게 될 기회가 많았다. 요리 솜씨가 좋은 친구 한 명은 종종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미얀마 요리를 해주었고, 친구들끼리 하는 미얀마 이야기를 귀동냥할 때도 많았다.

지금도 상황이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22년에는 쿠데타의 영향을 더 크게 체감하고 있었고, 그만큼 친구들이 느끼는 불안이나 절망감도 컸다. 학기 초에는 학내에서 미얀마 출신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로 발견된 일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미얀마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활발히 했던 청년 활동가인 것으로 밝혀져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학교 내에 혹시 미얀마 군부와 내통하는 세력이 있는 걸까 불안해하기도 했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코로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료체계가 붕괴된 상황에서 저마다 코로나로 가족을 잃은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군부가 매달 5천 명은 징집하겠다고 밝히면서 또 한 번 미얀마 사회에 혼란이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본국에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의 걱정이 커졌다. 어떻게든 징집을 피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갑갑했다. 나와 홍콩 친구는 차마 그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어서 그저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사뭇 다른 정치사회환경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던 건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함께 2천 원짜리 밥을 먹고 도서관에 몰려다닐 때에는 모르다가도, 가끔 방콕 시내로 같이 놀러 나오거나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경제적인 차이가 두드러졌다. 불편한 진실이었다. 나와 홍콩 친구가 태국에서 느끼는 물가와 미얀마 친구들의 감각은 당연하게도 달랐다. 다들 미얀마에서 국제기구나 외국계 NGO에서 일하며 평균 이상의 월급을 받았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에서 미얀마인이 유학하는 것과 한국인이 유학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친구들의 한 달 총생활비는 내가 내는 월세보다 적을 것이다. 물론 내가 나이도 많기 때문에 모아놓은 돈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태국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인 '저렴한 물가'는 사실 전 지구를 놓고 봤을 때에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됐다. 동시에, 미얀마 친구들에게는 나와 홍콩 친구는 자격조차 되지 않는 장학금 혜택이 많았다. 실제로도 친구들은 학비감면에 더해 생활비 지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아세안 국가에서 온 친구들에게는 더 많은 장학금 기회가 있고, 문과 석사생에게도 전액장학금 같은 프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경력이 10년이 됐는데도 대기업 초봉도 안 되는 NGO 연봉을 받아들고 한숨쉬곤 했는데, 여기서는 내가 일종의 '가진 자'라는 게 낯설었다. 이것 또한 불편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었다.  


4. 태국은 절대 당신을 굶게 놔두지 않는다


한국인이 먹는 것에 진심이라지만 태국인도 만만치 않다. 먹을 것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높다. 액세스 투 푸드! 어디에서나 국수 한 그릇, 시원한 음료를 파는 노점상을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면 사원이든 병원이든 길거리든 어디에나 먹거리 장터가 선다. 그리고 2천5백 원 정도면 꽤 괜찮은 한 끼를 할 수 있다. 위에서 경제력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구들이 같은 동네에서 먹고 놀 수 있었던 건 50-60밧짜리 밥이 맛있고 흔하기 때문이다. 쇼핑몰이나 방콕 중심가의 고급식당은 당연히 한국 밥값보다 비싸지만, 평소에는 식비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는 점이 정말 좋다. 집 앞 시장에서 자주 저녁을 사 먹는데, 팟타이가 20밧(약 750원)라서 너무 놀랐던 적이 있다. 천 원도 안 한다고요...? 새우 하나 없이 두부 큐브와 숙주나물 몇 개가 고명의 전부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20밧이라니요!? 다시 생각해 보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750원짜리 팟타이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다. 방콕의 빈부격차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도 값싼 식사로 배울 채울 수 있고, 에어컨이 없는 8밧짜리 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과일은 또 얼마나 저렴한지. 제철 과일은 시장에서 몇 천 원이면 냉장고에 쟁여놓고 먹을 수 있다. 사과는 수입산인데도 7개에 4천 원이고 맛있다(어째서?). 한 번은 캠퍼스 안의 잭푸르트 나무에서 잭푸르트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다 못해 땅에 떨어져 썩어가도록 쌓여있는 걸 보고, 와 정말 풍요롭다는 감각이 이런 거구나, 했다. 사회 안전망은 부족해도 사회 과일망(?)이 최소한 나를 굶어 죽지는 않게 해 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강과 바다와 숲에서 각종 생선과 고기와 과일이 넘쳐나는 이 풍요로운 나라에 있다 보면 나도 한템포 느긋해진다.


여기까지 썼는데 집에 택배가 왔다고 해서 얼른 들어가 봐야겠다. 막상 쓰고 보니까 대학원에 대한 건 하나도 없고 태국에 대한 것뿐이네...? 한 네 가지 정도 더 쓸 거리가 남았는데 학교 생활이나 태국 대학교에 대한 얘기도 (언젠가는) 날 잡아서 해보겠다. (언제 또 쓸지 모르지만) 투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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