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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퍼실리테이터 Oct 17. 2024

혹시나병에 걸린  퍼실리테이터의 가방


점점 보부상이 되어간다. 퍼실리테이터로 일하던 초반만 해도 나는 그저 포스트잇 몇 장, 네임펜 몇 개만 챙기곤 했다. 토의 방법과 도구에만 열중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며, 논의 현장을 둘러싼 다양한 환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여자는 교육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각, 후각, 청각 등 오감으로 판단한다.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될지, 아니면 다른 행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경험이 될지 말이다. 소개팅에서 첫 인상이 상대를 알아갈 의향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교육도 첫 만남이 중요하다.


참여자가 입장하는 순간, 첫 만남은 시작된다. 따뜻한 온도, 쾌적한 공기, 친절한 안내판, 배고픈 시간을 배려한 다과 등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소중한 걸음을 해준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이 와서 너무 기쁘고 환영해요."라는 느낌이 든다면 어떨까? 자연스레 마음이 열릴 것이다.



환대와 존중의 느낌은 중요하다. 정보 전달을 위한 교육도 머리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심리적 거부감이 들면 강사뿐 아니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의 토론도 힘들어진다. 열린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어떤 경험을 설계하든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 중 하나다.



또한 참여자가 몰입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치과에 갔을 때,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의사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처럼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불편함 없는 주변 환경이 필수적이다.


깔끔하고 쾌적한 환경을 위해 나는 펜슬 케이스부터 재활용 박스와 공기 탈취제까지 준비해 간다. 다방면으로 불편하거나 어수선할 만한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 요소들만 제거해도 기본 그 이상은 간다.



없던 직업병도 생겼다. 동료 사이에서는 '혹시나병'이라 불린다. "혹시나 요청한 물품이 없으면 어떡하지? 혹시나 현장에서 컴퓨터 연결이 안 되면? 혹시나 공간이 너무 협소하면?" 철저하게 사전 검사를 해도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수들로 인해 점점 가방이 커진다.(이게 괜한 걱정은 아닌게,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최근에는 업무용으로 28인치 대형 캐리어를 사서 끌고 다니는데 이것도 모자랄 판이다. 잘하고 싶은 욕심과 쌓이는 경험만큼 준비물도 늘어났다. 교육을 향하는 길, 가방은 점점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점점 편해진다. 참여자들이 한 번 더 환대받고 오롯이 이 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 이 정도 수고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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