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실행
신고
라이킷
14
댓글
2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문비
Mar 01. 2022
'가족에 대한 의무감' 속에서 자라온 당신에게
우선 이 글을 보게 된
가족문제를 힘들었을 모든 이들에게
당신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
이미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는 말
을 전하고 싶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은
부모님이라 불리는 사람들로 인해
매
우 힘들었을 수도 있다.
혹은 자매, 형제라 불리는 사람들로 인해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나 또한
가족 중
어느 사람들로 인해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대략 10여년의 시간
그 중에서도 정말 힘든 기간이 있었던
인생의 어느 부분은
하얗게 태워져 기억이
잘 나지 않
을
정도다.
'가족으로 인해 힘든 기억'
이라 쓰인 문 앞을
어쩌다 갑자기 지나갈 때쯤이면
나의 뇌는
현재의 밝고 즐거운 내가
절대 그 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얗고 거대한 안개를 설치해놓았다.
그 거대하고 하얀 안개는 항상
기억의 문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서,
이 문은 중요하지않으니
지금
네가 가던 길을 가렴
네가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생각과 행동에만 집중하렴! "
라고 말하며
아픈 기억들이 아픈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도록 마법을 한가득 부렸다.
그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 있다.
바로,
'현재 공간
'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이 소중하고도 거대한 공간..
그 안개는 힘껏 기억의 문을 가리려 마법을 부리고 있었지만
현재 공간에서는 여전히
가족문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생생하고도 새롭게 쌓이고 있었다.
" 음? 그러면 그 안개는 왜 그렇게 억지로 가족에 대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지?.. "
나는 그때마다 생각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의문들은
바로 녹아사라지는 솜사탕과 같았다.
그래서 안개가
무엇을 숨기려하는지 집중하기도 전에
나는 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받아들이기 바빴다.
현재 공간에서는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다음 생각들이
나에게 좀 집중해봐!
라며
현란하고 눈부시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돈을 벌어야지'
'주식 시장에 좀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어때?'
'사람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느끼자고!'
'끌어당김의 법칙 너 본 적 있지? 그것에 의하면 너는 지금 행복한 상상을 해야 해!'
가족에 대해 느껴지는 불편함
이
나의 현재 공간에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것을
나는 분명 싫어했다.
그래서
아예 나의 시간에 못 들어오도록
그들을 외면하
고 싶었다.
하지만 막아내는 방법을 전혀 몰랐고,
무엇보다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다.
물론 내 현재 공간을 지켜내는 방법은 나 스스로가 만들어내야 했지만
내가
가족과 연을 끊는 방법을 굳이 행하
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너무 특이하고, 유별나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이 내 현재 공간을 못 들어오는 것을
막는 행동이
왜 특이한 것인지
왜 나쁜 행동으로 생각되는지
스스로에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현재 공간에 찾아오는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사전에 막아내어
감정적 회복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어보아도 괜찮다.
라는 안심을 가질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가족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오은영 상담사님의 유튜브 영상 댓글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제가 가족으로 인해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요,
지금은 연락을 일절 안 하고 있는데 너무 마음이 편안해요 정말..
그때는 왜 그렇게 힘들게 버텼는지..
아예 독립을 하고 좋은 사람도 만나서 예쁜 사랑 하며
나도 이렇게 사랑받는 존재구나를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댓글로 남겨진 사례는 나에게 큰 위로와 공감이 되는 듯했다.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이 느껴졌고,
내가 가족들로부터 멀어지는 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만으로
"
괜찮음
"
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댓글 작성자의 세상에만 적용되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남겨졌다.
내가 정말 그 댓글 속 이야기처럼 따라 해도 되나?
라는 '합리적 판단'에 의존하는 이성적 습관이 자꾸 나를 가로막았다.
내 안에
가족에 대한 의무감은
아주 깊고 커다랗게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의무감은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내야 의무감을 현재 공간에서 깨끗이 지워내고,
지워낸 커다란 빈 공간에는
진정 내 인생의 편안함을 위한 순간들이 천천히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에 대한 의무감'을
우리가 얼마나 깊게 지니고 있었는지,
의무감을 지워도 왜 괜찮은지,
이 선택이 더 나은 강력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통해
의무감에 대해 초반에 다뤄볼 것이다.
그다음에는
앞으로 끊임없이 펼쳐질 현재 공간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인지하면 좋은지,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나의 행복을 위한 원칙을 어떻게 만들고, 유지해갈 지를 다뤄보려 한다.
(* 마음을 힘들게 하는 가족에 한정된 이야기임을 다시 알려드립니다.)
1단계 : 불필요한 의무감 지우기
2단계 : 의무감이 없을 때 왜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일 수 있는지 선명하게 인식하기
3단계 : 가족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세상에서 현재 공간에서 행복하기 위한 나만의 원칙 세우기
다시 본론으로,
가족에 대한 스트레스가 큰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한 의무감이 어떤 친구인지
들여다보자.
수많은 나의 주변 사람들은
'가족문제'
이기 전에
'가족'
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나의 삶에 함께 그들과 숨을 쉬고
그들과 즐겁고 화목하게 지내는 방식으로 각자의 현재 공간을 가득 꾸며내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의무감'이라고 정의 내릴 필요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단순하게 가족들을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의 현재라는 시간에 편안하게 가족들을 초대할 수 있는 그들이
나는 부러웠다. 정말로,
편안함 < 불편함
그들과 달리,
내 안에는 편안함 대신 불편함이 가장 커다란 파이로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족'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달리 불편함의 비율이 더 높다고 해서
'내가'
가족에 대한 의무감을 버려도
괜찮을까?
이
렇게
불편한 사람들을 멀리하고싶은
자연스러운 이런 반응을
이상한 느낌
으로 변형시키는
친구
는
바로
가족에 대한 의무감
이라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자신을 없애려고 내가 한 걸음만 다가와도
어쩌면 가장 강력한 삶의 중축인
'본연의 나'
를
'나쁜 사람', '불효자', '사회라는 것에 동화되지 않는 이방인'.
. 등 등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싶은 '나'를 완전히 차가운 온도의 방으로 몰아갔다.
나는 절대 그 의무감이라는 친구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 의무감 친구처럼 똑같이 나에게 차갑게 말하는 사람들이
현재 공간에도 생생하게 숨을 쉬며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친한 친구, 가까운 친인척의 이름을 하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할 곳이 없어
용기 있고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말을 하고 나면
해당 이야기 속 '나의 감정'은 그들에게 투명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단단한 바위 덩어리뿐이었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는 힘들게 바깥으로 다듬어져 나왔지만
순식간에 허공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가장
내 편
이라고 느껴지기 쉬운 대상은 모두에게 아마 '가족' 일 것이다.
이런 가족이 내 편이 아니라, 나의 가장 큰 적이라고 인식되며
성장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과연 '내 편'이라고 느껴지는 존재가 무엇일까?
가족이 아니라면 누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가까운 친구일 것이며, 선생 혹은 멘토, 온라인에서 만난 지인 등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불현듯 찾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편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반대하는 것 같은 사람들인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잘해줘야 해"라는 의무감은
결국 '가족'을 불편하고, 더욱 회피하고 싶다는 마음에
끊임없이 무거운 무게를 한 마디씩 더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하게 인지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불편한 가족에 대한 의무감은,
그럼에
도
나를 아프게 한 가족이
언젠가는
'내 편'
으로 느껴지
길 바라는
무의식 속
남은 희망마저
지워내
고 있었
다.
의무감은 자주 말했다.
"그래도 너의 가족인데,
세상에 너를 태어나게 한 사람들인데,
그렇게까지 굳이 해야 하니?"
"..... 근데 나는 그들과 함께 하면 항상 그리고 많이 힘들었어
행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
"그래도 네가 가족이 있었기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너는 학교 숙제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어
물론 가족이 아예 없는 친구들도 있지만
너는 있잖니? 있으면 잘해줘야 해! 그들은 너보다 일찍 죽을 거고
그럼 넌 슬플 거야.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그들과 잘 지내야 해"
"근데 넌 누구니?"
"아! 내 소개가 늦었네 ^^
내 이름은 '의무감이자 죄책감' 이란다.
내가 태어난 곳은 아마도 한국이라는 곳인 것 같아.
한국에서는 나를 되게 환영해주거든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설날, 추석, 명절이 아주 오랜 시간 풍요롭게 유지되어왔지
근데 이런 내가 왜 지금 너한테 오게 되었는지는
나는 너한테 당연히 필요한 존재야.
"
"왜 네가 나에게 필요한 존재인데? "
"그 이유는 음 모르겠지만.. 너에게 가족은 필요한 존재 아니니?
아무튼 확실한 것은 나는 가끔씩 자주 너의 앞에 찾아올 거야.ㅋㅋ"
그랬다.
그 의무감은 '죄책감'과 붙어서 함께 다가오는 존재였다.
더불어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추억을 많이 쌓고 심어진 친구였다.
가족에 대한 의무감 친구는 가장 나의 많은 일상생활을 차지했던 학교에서
선생님과 나의 주변 모든 학급 친구들도 당연히 잘 지냈어야 했던 친구였다.
매년 5월의 어버이날 카네이션,
매년 3월 떠나는 봄 소풍에서의 도시락,
매년 2월 가족들이 찾아오는 졸업식
매달 1번 이상은 주어진 급식비
모든 순간에서 나의 생활을 유지하는데에서 없으면 안 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밥을 먹고 새로 만난 친구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나도 가족이 있어야 했다.
더불어 선생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가족에 대해 바르게 대하고 존중해줘야 한다고 가르쳤다.
깨끗하고 하얀 도화지 같은 내면에 그 가르침은 선명하게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의무감 친구는 그렇게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마음에서
함께 성장해왔다.
여기까지, 가족에 대한 의무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간단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의무감'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의무감'이라는 단어가 한두번도 아니고
매번
떠올려지는 인간관계라면
그리고 그것이 하필 가족이라면
오히려 더욱 더 의무감이라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해방되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계속 갇힌채로 나이가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게된다.
의무감 대신에 우리가 선택해야하는 것은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다.
이제 나와 당신이 마주해야 할 것은
이런 의무감이 내 안을 빠져나와
그저 흘러가는 하늘에 깔끔하게 날아가도록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으로 인해 아프고, 괴롭고, 우울했던 시기들
얼마나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감정들이 자주 올라왔는지
얼마나 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는지
그 과정을 이제는
다시 용기 있게 마주하고, 기억이 떠오를 때 애써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의무감이라는 답답한 포장지에 싸여있었던
아픈 마음에 맑은 물이 흡수되기 시작하고
벗겨진 포장지로 인해 만나게 된 넓은 공간에서
밝은 색깔의 꽃이 피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하여 진정 삶의 주인공인 '나'를 이롭게 하는 과정.
이 과정은 결코 차갑고 심각한 과정이 절대 아님을 먼저 말하고 싶다.
이 과정은 나에게 가장 따뜻하고도 필요했던 시간일 것이다.
물론 아픔을 마주해야 하니 그렇지 못하다고 느껴질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먼 미래에서 이 과정을 돌이켜보았을 때,
따뜻한 주황빛 햇살이 이 시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keyword
가족
스트레스
인간관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