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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y 05. 2024

엄마가 불편해졌다

집을 나온 후 일년에 한두번 보는 엄마를 만나면 흘러가버리는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더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엄마의 웃음, 엄마의 주름, 엄마의 목소리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지워지는 것이 아쉬웠다. 붙들 수만 있다면 붙들고 싶었다. 되도록이면 더 자주 만나고, 더 자주 웃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의 가장 애틋하고 아픈 존재

엄마는 나에게 '숨'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상처받으면 나는 배로 상처를 받았다. 할머니와 아빠를 증오했던 이유 중 큰 부분도 엄마를 가족 내에서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그녀를 공개처형하듯 비난했던 까닭이었다. 나의 엄마, 나의 가장 애틋하고 아픈 존재, 그녀의 생이 불행할까봐 나는 늘 전전긍긍했다. 자식인 내가 그녀에게 기쁨이 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엄마가 불편하다니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일까.   

 

오랜만에 엄마와 만나기로 한 일주일 전부터 내가 부담스러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예전에 집에 갈때마다 찾아오는 체증처럼 엄마를 만나는 게 불편했다. 내가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못돼 처먹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또 죄책감이 슬며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1년 전쯤부터 엄마는 만날 때마다 이제 그만 아빠와 관계를 풀면 안되냐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다. 아니 사정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를 안보고 살 수는 없다고 나를 달랬다가, 화를 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어르고 달래기를 반복했다.


- 할머니가 오늘 내일해.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은 봐야하지 않겠니? 

- 아빠도 예전 같지 않아. 

- 엄마도 늙었어. 많이 외롭다


 내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들을 끝도없이 쏟아냈다. 만남이 반복될수록 엄마의 만남은 부담스러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엄마니까 이 정도 잔소리는 할 수 있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는데 내가 너무 예민한가?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만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자식이 부모를 안보고 살아갈 결심을 할 때의 마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다. 그대로 나를 세상에 지우고 싶을 정도의 죄책감을 짊어지는 일이다. 그 짐을 고스란히 지고 나는 집을 나왔다. 그 이후 한 번도 내 마음에 햇빛이 든 적 없었다. 온통 곰팡이로 뒤덮힌 방에 갇혀 있는 것처럼 눅눅하고 축축한 기분으로 몇 년을 살았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어야 했다. 

엄마는 최소한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어야 했다. 집에 오라는 말 대신 어린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아빠로부터, 할머니로부터, 나를 상처주던 그 많은 것들로부터 엄마가 회피했다고. 당신이 너무 힘들어서 나를 보지 못했다고. 

언제까지 아빠를 안보고 살거냐고 다그치는 대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을 주기보다 평가하고 원망해서 미안했다고. 격려하고 괜찮다는 말 대신 실망하고 비난했다고. 그게 너희에게 큰 상처가 될 줄 몰랐다고.

 

정말로 그 말 한 마디면 됐을 지도 모른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진득하게 들러붙어있는 슬픔이 깨끗하게 씻겨지고 햇살이 비추는 데에는 그리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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