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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언니 Feb 03. 2017

49. 파티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해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영화 <비포 미드나잇>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휴가차 그리스에 온 제시와 셀린느. 둘은 석양이 지는 바닷가에 앉아 져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되뇌이듯 중얼거린다.


"Still there. Still there...... Gone.....”

아직 있어. 아직 있어......졌네.....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지만 그 말속엔 안타까움이 배어 나왔다. 얼마 전까지 그토록이나 밝게 빛나던 자신들의 청춘이 마치 바다 밑으로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  


@picture from the movie <Before Midnight>



그들의 첫 만남은 <비포 선라이즈>였다. 여행 중 기차에서 우연히 알게 된 제시와 셀린느. 20대 청춘의 한가운데 활짝 핀 꽃 같았던 그들은 9년 뒤 <비포 선셋>에서 30대의 성숙한 모습으로 재회를 한다. 나는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다. 아이쿠. 나의 에단 호크가 저렇게 늙었다니! 줄리 델피의 고왔던 피부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다시 9년 뒤 <비포 미드나잇>. 달콤하고도 로맨틱했던 선라이즈, 솔직하지만 서로의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 여전히 두근거림과 설렘이 남아있었던 선셋, 그렇게 해가 뜨고 지는 사이의 시간들이 흐르고 밤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만난 둘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있었다. 이제 그들 사이엔 자녀 양육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과 일상의 피곤함과 타협 지점이 없어 보이는 논쟁들이 내내 오고, 갔다.       


하지만 예전처럼 실망스럽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한 변화를 세월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게 된 탓인지도 모르겠다. 내 삶도 그들과 더불어 흐른 셈이다.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영화가 있다는 건 조금은 멋진 일 같다. '오늘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젊은 날' 이런 문구보다 훨씬 위로가 된다. 다음 시리즈는 어떤 영화가 될까? 제시와 셀린느, 그들의 9년 후가 문득 궁금해진다.





지혜니 성숙이니 하며 나이 들면서 얻게 되는 좋은 점들에 대해 아무리 말한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젊음을 택할 것이다. 젊음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스케치북처럼 그것 하나만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시기이니까. 지금의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할 수 없는 것도 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고 가끔은 내가 대단한 듯 생각되다가도 이내 아무것도 아닌 약한 존재라는 걸 수긍한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본의 아니게 겸손해져 버린다. 



아직 있어.. 아직 있어... 라아히나의 바닷가에서 그들처럼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푸르던 하늘을 분홍빛으로 붉은빛으로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왔다가 가는 순간들을 더듬어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이렇게 왔다가 가는 거겠지. 노을은 이 시간들을 아름답게 덧칠해 주었다. 해가 진다고 안타까워할 순 없지. 저녁은 다시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밴드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리듬에 맞춰 어깨를 흔들고 맥주와 칵테일과 웃음이 오고 갔다. <무탄트 메시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이 먹는 걸 축하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엇을 축하하죠?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나아지는 걸 축하합니다. 작년보다 올해 더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티를 열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요.”




나이 먹는 건 여전히 썩 기쁘진 않지만 대신 멋지게 나이드는 법을 하나씩 배워가면서 오늘도 내일도 해지는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고 싶다. 어쨌든 지금은 여행 중이고 오늘은 내가 가장 젊은 날이라니 뭐. 일단 내 가장 젊은 날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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