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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Jun 09. 2022

미술이 심리학을 만나는 지점

< 인문학적  명상 > 2021/9월 문학사상 개제 에세이




팬데믹이라는 복병을 맞은 지구촌은 잠시 멈춤의 상태에서 진통의 시간을 보냈다. 미증유의 첨단 과학기술을 응용한 백신 개발의 성공과 상용화는 다행히도 일상을 되돌려 놓는 듯 했다. 그러나, 변이를 거듭하는 보이지 않는 적과 지루한 싸움은 계속되고 시대에 대한 비관의 목소리는 높아간다.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처했을 때 해결을 위한 우리의 모색은 흔히 축적된 데이터를  탐색하는데서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하나의 긍정적인 힌트는, 인류는 병원체라는 적들과 공생 관계로 진화해 왔고 펜데믹은 역사의 변곡점을 가져오곤 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데, 중세 페스트의 여파는 르네상스 문예 부흥이라는 놀라운 역설을 가져왔다. 엄혹했던 종교의 시대, 대책 없는 전염병의 창궐과 일상적인 죽음의 행렬 앞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절대적 권위는 무너져 내렸고, 지식인들은 이성과 과학에서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지식인들은 종교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그리스의 과학적 사고와 인문학적 전통을 부활시켰던 한편, 귀족들과 부유층, 상공업자들은 종교예술의 부흥을 통해 상한 정신의 치유를 염원했다.

    르네상스 문화혁명은 이런 사회적 격변과 혼란상을 극복하려는 모색에서 비롯되었다. 위기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위기라는 장벽 障壁을 또 하나의 문 門으로 바꾸어 온바, 펜데믹의 종료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이 열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술의 절정은 사회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 속에서 도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역사는 곤궁에 처한 인류를 위로해 온  것 역시 예술의 힘이었음을 반증한다.  현시대의 정신적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예술은 그 어느 때 보다 힘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한다.


비대면 시대 확장된 예술  공간


사진  1 & 2- 구글 아츠앤 컬쳐, 증강현실을 통한 칸딘스키 전시회, 퐁피두 센터, 프랑스




르네상스 예술혁명과 더불어 구텐베르크가 금속 인쇄술을 발명한 사건은 지식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현재는 어쩌면 구텐베르크가 가져온 지식 혁명과 맞먹는 변화를 겪고 있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비대면 시대의 도래는 21세기 정보통신과 인터넷 기술의 발전과 맞물려 전 지구적 유비쿼터스의 생활을 가속화 하고있다. 예를 들면 구글은 예술과 문화에 특화된 페이지 구글 아트 앤 컬쳐 Google arts and culture를 통해 전 세계 미술관의 소장 컬렉션을 제공한다. 세계의 미술관을 연결한 온라인 상설 전시와 증강현실  virtual  reality를 각국의 언어로 제공하는 서비스는 누구에게나 편리한 미술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손에 쥔 스마트 폰을 이용해 증강현실  버튼을 누르면 내 집 거실은 퐁피두 센터의 칸딘스키  전시장으로, 혹은 네덜란드의 페이메이르의 전시장으로 변한다. 마치 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하듯이 거실의 구석 구석을 걸어다니며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 역시 독자적으로 온라인 전시를 제공함으로써 비대면 시대의 생존을 꾀하고 있다. 온라인 전시의 한 가지 이점은 전시 공간의 물리적 한계로 공개되지 못하던 컬렉션의 전시가 가능해지고, 따라서 관객들은 더욱 다양한 미술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들은 주제에 따라 고전 작가들과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병행 전시를 꾀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고전의 재해석과 현대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보티첼리의 몇 가지 주제에 상응하는 현대의 작품을 동반 전시함으로써 고전과 현대의 소통을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포스트 펜데믹을 준비하는 기술진보의 양상은 흥미롭다. 그러다 보면,  기술이 진보를 거듭해 세월이 흐른 어느 날엔가는 스타트렉에서 스폭이 (양자 이동을 이용해) 엔터프라이즈호에서 벌건 행성으로 순간 이동을 했던것처럼 양자 이동을 현실화하는 기술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1997년 오스트리아의 안톤 차일링거 교수는 세계 최초로 광자를 전송하고 복사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그렇게 된다면 휴스턴의 내 집 거실에서 디지털 전시를 감상하다가 이탈리아의 미술관으로  물리적 순간 이동을 감행하는 시절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21세기의 펜데믹이 종식된 이후의 시절은 우리에게 또 어떤 차원의 문을 열어줄지 자못 궁금하다.


미술이 꽃피는 사회


요하네스  페이메이르, 기타를 연주하는 연인, 1672년경, 유화


요하네스 페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1666년, 유화


미술관과 문화생활을 향유할 기회가 차단된 시절, 예술 감상 기회를 제공하는 온라인 서비스가 큰 효용을 발휘한다.  그가운데, 미술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정치/경제적 안정기로  접어든 사회의 시민들은 정치나 종교의 거대 담론으로부터 눈을 돌려 현실적 문제와 개인의 성역을 풍요롭게 가꾸는 데 열중해 왔음은 역사가 보여준  사실이다. 미술은 그런 사회의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미적 향유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신이 성숙해온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지적 탐구의 매개체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예술의 수도가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에서 탄생해 왔던 것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발현했고, 17세기 네덜란드가 대항해시대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북유럽 바로크가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신대륙의 수도인 뉴욕이 예술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것은 유럽의 화가들이 1, 2차 세계대전의 화마를 피해 뉴욕으로 이동하면서였다.


대항해 시대 네덜란드의 경제성장은 중산층과 시민계급의 확대 성장으로 이어졌고,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던 시민들은 정물화와 일상의 풍경을 그린 장르 화로 가정을 장식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북유럽 바로크의 대명사인 렘브란트의 성공은 네덜란드의 독립에 잇따른 경제적 성공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세계의 무역항으로 등장한 암스테르담은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앞으로 전 지구를 가져다주었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상공업자들의 얼굴을 기록했다. 현대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중 한명인 요하네스 페이메이르 Johannes Vermeer는 그 시대 시민들의 일상풍경을 섬세한 감각으로  포착해 시적으로 승화시켰다. 빛이 스며든 생활의 공간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페르메이르의 그림에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에 대한 현대적 감성이 녹아있는 것이다.


 미술, 자기표현과 치유의 방식

미술에 대한 전에 없던 관심과  더불어 심리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매우 뜨겁다. 한국의 산업화 세대는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급속 성장을 이룩했지만, 그 빛나는 성장은 개인의 존엄과 인권, 정신과 내면 세계의 희생이라는 반대급부를 담보로 한 것이 사실이었다. 심리학에 대한 현재의 관심은, 산업화 시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개성과 존엄성의 회복, 가치의 다양화, 그리고 내면의 안정과 정신적 성장을 갈망하는 사회의 집단적 욕구의 분출로 보인다. 심리학은 그 모두를 담보할 수 있는 처방전으로 인식되고 있고, 치유와 힐링, 공감이라는 단어는 2020년대의 한국사회의 정서적 요구를 특징짓는 단어인듯 하다.

개인의 내면세계 치료와 성장, 그리고 정신적 회복을 담보하기 위한 심리치료에는 여러 가지 접근법-모듈-이 있지만, 미술치료는 특히 매력적이다. 자기표현의 욕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 가운데 하나이고,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하나의 소우주이다.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 그림은 그 어떤 매체보다 선명하고 가시적인 메시지를 발신한다. 또한 그림은 언어와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사 표현 수단일뿐더러 아름다움의 대상이다. 임상심리학자로서 내게 있어 그림은 개인이라는 소우주를 해석할 수 있는 시각적 언어이자, 심리 진단과 치료의 단서를 제공하는 키워드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그림은 빗장이 굳게 쳐진 한 개인의 내면세계로 향한 초대장 혹은 열쇠 같은 것이다. 치료실을 찾은 환자들의 굳게 닫힌 입과 마음은 종종 낯선 그림 앞에서 출구를 발견한 듯,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불현듯 쏟아내곤 했다. 그런 경험의 시간들은 미술관이 치료실로 변할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또한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을 감상하다 보면 마치 내담자의 그림을 읽을 때와 같은 직업적 의식이 내  안에서 은연중에 작동되곤 한다. 미술관을 나서면 내가 읽은 그림이 과연 화가가 전하고자 했던 바로 감정과 생각 또는 이야기인지 확인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탐색하곤 한다.

반 고흐가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고통을 잊고 정신적 해방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취미로 그림을 배우는 내게 있어 그림은 피사체의 본질을 포착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아내어 문제를 해결해 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상과 현실을 오랜 시간 마주하고 오롯이 마음을 모아 바라보면, 처음 문제를 대면했을  때의 막막함은 서서히 걷어지고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곤 한다. 그 순간의 잔잔한 즐거움과 문제해결의 카타르시스는 그림을 그리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결국  삶의 여정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란 나를 둘러싼 관계와 대화 나누는 일, 그런 대화 과정의 연속이다. 화가들의 예술적 여정 역시 최선을 다해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의 질서와 에센스를 발견해 내는 시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예술이란 결국은 그런 시간의 응집이자  결정체이고 우리의 인생 역시 그런 과정의 연속일 것이다. 그래서 미술 작품들로 가득 찬 세계의 미술관에는 전 세계로부터 방문객이 몰려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 감상을 통한  감정교육과 공감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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