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의 아방가르드, 조망의 확장 – 벨라스케스
17세기 예술의 목적은 신화나 카톨릭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이상과 가치를 서사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었고, 벨라스케스는 당대의 그 어느 화가보다 뛰어난 예술적 기교로 그것을 구현해 내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현대에 와서도 화가들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추앙을 받는 이유는 당대의 이상적 가치와 역사와 서사를 탁월하게 담아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신화와 서사, 특권 계급만이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에 낮고 하잘것없는 존재와 일상을 들어 올려 그들의 숨은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벨라스케스는 최고 권위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궁 안의 난쟁이와 광대, 노예들의 영혼을 응시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기록한다. 왕족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던 그들의 영혼은 벨라스케스의 손끝에서 영생을 얻어 생생한 존재로 오늘날 우리 앞에 탄생한다. 신분에 관계 없이 모든 인간을 평등한 시선으로 바로보며 시대가 정한 가치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화폭에 담았던 진취적인 관점이야말로 그가 화가들의 화가로 존경받는 이유가 아닐까. 시대를 앞서간 벨라스케스의 심미안은 그야말로 전복적인 관념이라 할 수 있다.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1599-1660)
벨라스케스는 (1599-1660)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스페인의 궁정 화가로서 화가들이 문인들과 동등한 예술가로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얻기 위해 일평생 노력했다. 약관의 나이에 국왕 펠리페 4세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던 그는 국왕의 전속 궁정화가로 30년을 근무하는 동안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초상화에 생생한 사실감을 불어 넣었고 빛과 색채의 절묘한 사용으로 깊이 있는 그림을 창조해냈다. 당시의 유럽에서는 최고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최고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곤 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림을 통해 자신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궁정에 있는 한 그 어느 나라의 국왕도 스페인의 국왕보다 훌륭한 초상화를 가질 수는 없다는 평이있을 정도였다. 벨라스케스의 시대를 초월한 심미안과 가치 전복적인 미학적 관점은 그가 살았던 당대 뿐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도 젊은 화가들의 예술혼을 고양시키며 조형 언어의 끊임없는 발전을 모색케 자극한다. 19세기의 마네와 인상파는 물론 20세기의 피카소와 달리, 그리고 동시대의 수많은 화가들과 미셀 푸코를 비롯한 철학자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자들까지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그의 작품을 모티프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만큼 그의 영향력은 방대하다.
궁정화가로서 재직하며 국왕과 교황 등 최고의 권력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순간에도 벨라스케스의 시선은 소박하고 남루한 대상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남루한 행색의 세비야의 물장수와 그가 날라다 주는 차가운 물동이를 포착한다. 차가운 물동이 표면에 응결된 물방울과 흘러내린 물방울의 얼룩이 가져다주는 차거운 느낌이 손끝에서 느껴지는듯 하다. 물잔을 받아든 소년의 클로즈업 된 얼굴은 갈증 해소의 대리만족과 잔잔한 행복의 순간을 일깨운다. 초기작품들에서는 카라바죠(Caravaggio : 1573- 1610)의 테너브리즘 기법을 활용한 결과, 빛과 어두움의 강렬한 대비를 통한 사실적 묘사가 도드라진다. 카라비죠의 그림이 강렬한 대비를 통해 충격과 극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던 반면 벨라스케스는 빛이 어둠을 감싸는 부드러운 대비를 통해 대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대상을 과장하지 않고 관념적 도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눈에 보이는 감각 세계를 그리는 일에 충실했다.
<세빌리아의 물장수>, 1618-1622, 캔버스에 유화, 106.7 X87cm, 앱슬리 하우스, 런던
17세기 예술의 목적은 신화나 카톨릭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이상과 가치를 서사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었고, 벨라스케스는 당대의 그 어느 화가보다 뛰어난 예술적 기교로 그것을 구현해 내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현대에 와서도 화가들의 화가로 불릴 정도로 추앙을 받는 이유는 당대의 이상적 가치와 역사와 서사를 탁월하게 담아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신화와 서사, 특권 계급만이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에 낮고 하잘것없는 존재와 일상을 들어 올려 그들의 숨은 아름다움을 드러내었다. 벨라스케스는 최고 권위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궁 안의 난쟁이와 광대, 노예들의 영혼을 응시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기록한다. 왕족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던 그들의 영혼은 벨라스케스의 손끝에서 영생을 얻어 생생한 존재로 오늘날 우리 앞에 탄생한다. 신분에 관계 없이 모든 인간을 평등한 시선으로 바로보며 시대가 정한 가치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화폭에 담았던 진취적인 관점이야말로 그가 화가들의 화가로 존경받는 이유가 아닐까. 시대를 앞서간 벨라스케스의 심미안은 그야말로 전복적인 관념이라 할 수 있다.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1599-1660)
벨라스케스는 (1599-1660)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스페인의 궁정 화가로서 화가들이 문인들과 동등한 예술가로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얻기 위해 일평생 노력했다. 약관의 나이에 국왕 펠리페 4세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던 그는 국왕의 전속 궁정화가로 30년을 근무하는 동안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초상화에 생생한 사실감을 불어 넣었고 빛과 색채의 절묘한 사용으로 깊이 있는 그림을 창조해냈다. 당시의 유럽에서는 최고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최고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곤 했는데, 이는 아마도 그림을 통해 자신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궁정에 있는 한 그 어느 나라의 국왕도 스페인의 국왕보다 훌륭한 초상화를 가질 수는 없다는 평이있을 정도였다. 벨라스케스의 시대를 초월한 심미안과 가치 전복적인 미학적 관점은 그가 살았던 당대 뿐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도 젊은 화가들의 예술혼을 고양시키며 조형 언어의 끊임없는 발전을 모색케 자극한다. 19세기의 마네와 인상파는 물론 20세기의 피카소와 달리, 그리고 동시대의 수많은 화가들과 미셀 푸코를 비롯한 철학자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자들까지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고 그의 작품을 모티프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만큼 그의 영향력은 방대하다.
궁정화가로서 재직하며 국왕과 교황 등 최고의 권력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순간에도 벨라스케스의 시선은 소박하고 남루한 대상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남루한 행색의 세비야의 물장수와 그가 날라다 주는 차가운 물동이를 포착한다. 차가운 물동이 표면에 응결된 물방울과 흘러내린 물방울의 얼룩이 가져다주는 차거운 느낌이 손끝에서 느껴지는듯 하다. 물잔을 받아든 소년의 클로즈업 된 얼굴은 갈증 해소의 대리만족과 잔잔한 행복의 순간을 일깨운다. 초기작품들에서는 카라바죠(Caravaggio : 1573- 1610)의 테너브리즘 기법을 활용한 결과, 빛과 어두움의 강렬한 대비를 통한 사실적 묘사가 도드라진다. 카라비죠의 그림이 강렬한 대비를 통해 충격과 극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던 반면 벨라스케스는 빛이 어둠을 감싸는 부드러운 대비를 통해 대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대상을 과장하지 않고 관념적 도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눈에 보이는 감각 세계를 그리는 일에 충실했다.
<바쿠스의 승리; 술취한 사람들>. 1628,캔버스에 유화, 165 × 225 cm,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궁정화가로 일하는 동안 루벤스의 방문을 받은 벨라스케스는 그의 권유로 고대와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러 로마로 가게되고 이 여행에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그리게 된다. 붉은 망토와 모자를 쓰고 화려한 의상으로 의자에 앉은 교황은 뭔지모를 못마땅함과 미심쩍어하는 듯한 눈초리로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나를 쏘아보는듯한 그와 눈이 마주치자 왠지모르게 움찔해진다. 벨라스케스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초상화는 교황의 성품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교황은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벨라스케스는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기 앞서 습작으로서 그의 물라토 노예인 후안 데 파레하 (Juan De Pareja, 1610-1670)의 초상화를 그린다. 후안 데 파레하는 벨라스케스의 화실에서 물감을 만들어 놓거나 청소를 하며 화가를 돕던 사람이지만, 초상화 속의 후안 데 파레하는 여느 귀족과 같은 당당하고 위엄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후 벨라스케스는 1654년에 그를 노예 신분으로 부터 해방시키고 자신의 화실에서 화가로 취직시키기에 이른다. 무려 340여년 전에 일어난 이 노예해방 사건은 평등과 존엄에 관한 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미국의 청소년 작가인 엘리자베스 보튼 데 트레비뇨는 벨라스케스와 후안 데 파레하 사이의 이야기를 엮은 아동을 위한 소설을 써서 뉴베리상을 수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