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메리 모지스가 그린 (Anna Mary Robertson Mosies,1860-1961) 전원 풍경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는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여사가 (Anna Mary Robertson Mosies, 1860-1961) 미국인들에게 받아온 사랑은 그녀를 수식하는 국민화가라는 말에 잘 표현되고 있다. 전문적인 그림 수업을 받은 적은 없지만, 뉴욕과 버지니아 농장에서 보냈던 전원 생활의 소박한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그녀의 그림은 누구에게나 친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캐네디 대통령은 20세기 초반의 시골 풍경을 그린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이 미국의 원초적인 풍경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를 일깨운다며 좋아했다. 평생 농장 일을 하며 자녀를 키우는 일에 전념했던 모지스 할머니가 노년에 이르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남편을 사별한 슬픔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다.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겨 바느질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모지스 여사는 바늘 대신 물감과 붓을 들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돌입하였다. 그녀의 나이 76세 때의 일이다. 모지스 여사는여느 농장의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만든 잼을 시골의 동네 전시회에 출품하곤 했고, 그녀가 만든 잼은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림을 함께 출품하기도 했으나 그림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날, 동네의 약국 진열장에 걸려있던 그녀의 그림은 맨하탄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상 루이스 캘더의 눈에 띄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다이내믹하고 천진한 에너지로 가득한 그녀의 그림은 곧 맨하탄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의 행보 역시 사회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88세에는 주요한 여성잡지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93세에는 타임지의 커버 스토리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또한 두 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할머니의 100세 생일이던 1961년 9월 7일은 "모지스의 날"로 선포되었고, 같은 해에는 ‘모지스 할머니 이야기'가 아동 도서로 발간될 정도로 각계 각층의 사랑을 받았으니,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 노년의 역전극을 이룬 일생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생일을 지난 그해 12월에 영면에 드셨으니 꼬박 한 세기를 사신 셈이다. 산다는 일에 있어 더 이상 새로울것도 추구할 것도 남아있지 않을 듯한 나이 76세에 붓과 물감을 들고 가지 못했던 길-화가의 길로 들어선 모지스 할머니의 행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일으킨다.
미술사에서는 모지스 할머니와 같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세련된 기교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림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과 소박함을 가득 담은 회화를 ‘나이브 아트 (naive art)' 혹은 원시 미술(primitive art), 아웃사이더 아트라고도 한다. 현대의 나이브 아트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캐나다 노바 스코샤의 모디 루이스(Maud Lewis, 1903~1970)가 있고, 그녀의 삶과 사랑,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에단 호크와 샐리 호킨스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Maudie, 2017).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의 프랑스의 주말 화가 앙리 루소 (Henri Rousseau,1844~1910)가 있다. 천재들과 아방가르드 화가들로 가득했던 19세기 파리에서 주말화가라는 별명을 가졌던 앙리 루소 였지만,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한 그의 그림은 세계의 주요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색채의 대가였던 마크 샤갈 (Mark Chagall,1887-1895)은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 나이브 아트 풍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피카소 역시 말년에는 아이들의 눈으로 아이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심리치료와 삶의 도구로서의 그림
노년의 열정과 예술적 성과를 세상과 공유한 화가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제시했던 ‘삶의 도구로서의 그림’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한 삶의 모델이다.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과 삶에는 알랭 드 보통이 제시했던 ‘그림이 가지는 심리 치료적 효과의 키워드들’ -기억, 희망, 슬픔, 자기 이해, 균형, 성장, 감상-이 골고루 담겨있다. 그림을 통해서 남편을 사별한 슬픔을 극복하고, 행복했던 일상의 기억을 시각 언어로 기록하고, 또 그 과정에서 지칠 줄 모르는 자기 성장을 도모했고,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자아실현의 궁극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 세계는 생활 예술을 실천한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녀의 일생의 행보는 전국민적 사랑을 받는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백 세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앞서간 롤모델을 보여주신 셈이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전성기를 펼쳐나갔던 화가 에나 메리 모지스. 그녀의 삶의 경력은 20세기 중반의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 제시했던 <자아와 정체성의 발달 모델>을 재고해 보도록 한다.
하버드 대학의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 (Erik Homburger Erikson, 1902~ 1994)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의 발달은 젊은 시절에 완료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생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임을 설명하는 성격발달 모델을 제시한다. 그는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의 각 발달 단계에서 특별히 요구되는 과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유년기에는 세상에 대한 신뢰와 자율성을 형성하는 것이 주요한 발달과제이며, 청소년기에는 정체성, 장년기에는 생산성을 발달시키는 것이 고유한 과제이다. 65세 이후의 삶은 발달의 마지막 단계로, 사회로부터 은퇴하고, 생산성이 저하되고, 소멸하기까지 생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삶의 되돌아보고 평가하며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모지스 할머니가 예술 창작을 통해 사별의 슬픔을 극복한 방식과, 결과적으로 맞이하게 된 노년의 전성기는 일찌기 에릭슨이 내린 노년기에 대한 정의를 재고하게 한다. 노년기가 단지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명제를 확인 시키고 언제든지 새로운 시작이 가능함을 그녀의 삶은 증명한다. 또한 노년기에 이르러서야 절정에 다다른 표현 가능한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애나 메리 모지스 <눈이다. 눈이 온다> 1951, 나무패널에 유화, 모지스 할머니 생가, 뉴욕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하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 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 중에서
애나 메리 모지스 <당겨라 소년들아> 1956,나무패널에 유화, 모지스할머니 생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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