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ㅅㅔㄱㅣㄹㅗ 날아간 시간 여행자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동시대의 그림들과 함께 전시됐을 때 시대를 훌쩍 뛰어넘는 급진성을 보여 주는 그림들이 있다. 「붉은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과 나란히 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깊고 풍부한 색채와 자연스러운 빛의 묘사가 친숙한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르놀피부 부부의 창백하고 우울한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극도로 사실적인 샹들리에의 반사광, 벽면에걸린 볼록 거울의 반짝임과 입체감은 17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했던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의 빛의 묘사를 능가한다. 인간의 눈과 손으로 이 정도의 치밀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놀라울 따름이다. 한 시민의 사적인 공간을 사진 같은 사실성으로 기록한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보면서 반에이크가 17세기 델프트에서 과거로 날아간 시간 여행자가 아니었을까 싶은 의심에 빠진다.
권력자가 아닌 부유한 개인이 그림의 주인으로 본격 등장한 것은 17세기가 되어서의 일이다. 은은한 자연광이 스며든 개인적 공간이 품은근대적 서정성은 델프트의 페르메이르나 피터르 더 호흐Pieter de Hooch
가 본격적으로 담아냈던 근대적 풍경이다. 렘브란트와 동시대의 페르 메이르, 호흐는 개인의 일상적인 서정성을 작품에 담아내 근대적 미의식을 보여 줬다. 개인의 등장은 중세와 근대를 구분짓는 차이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핵심 가치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고, 그것은 자기 가치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바탕에 두고 있다. 중세의 가옥은 집단 거주의 형태였지만 근대의 가옥에는 개인의 공간이 등장한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사적인 활동에 침잠하는 풍경은 아마도 인류적 자의식이 발현하는 풍경일 것이다.
사람의 일생이 자아가 눈뜨고 성숙하고 변화해 가는 발달적 과정이라면, 종으로서 인류의 자의식이 발달하고 변화해 가는 과정은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회화는 문명의 발달과 진화 과정의 시각적 기록이고, 인간의 자아와 인지적 활동이 이루어 낸 성과를 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중세와 근대가 구분되는 시기는 예술이 공공의 영역에서 개인의 영역으로 넘어오던 무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숙한 반에이크의 자아가 눈뜨고 독립 자화상을 제작한 시기가 1400년대 초반, 중세에 속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또한 그 공간이 예술의 수도 이탈리아가 아닌 북유럽의 플랑드르라는 사실도 예외적이다.
플랑드르에서의 개인 자화상의 탄생은 거룩한 예수의 모습을 닮은 뒤러의 자화상보다 70여 년 앞섰고, 자화상으로 일대기를 기록했던 렘브란트보다 200년이 앞선 것이었다. 반에이크는 소년 같은 동급생 사이에서 홀로 조숙한 청년의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들의 자취도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북유럽 예술가들의 집단적 겸손을 일거에 보상하는 그의 존재감은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플랑드르 회화의 개성은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