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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r 21. 2024

브루게/브뤼게/브루허의 실내

Day 2. Aragon hotel /restaurant @ Brugge

누군가는 말하길 세상에 절망할 것 같으면

파리의 카페 테라스에서 하라고 했지만

나는 부르게에서 하라고 말하고 싶다.


번영과 쇠락을 거듭하며 불가항력의 자연에 대항한

인간의 끈기가 만들어 낸 성채

중세의 메트로폴리스는 휴머니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바다로부터 들어온 물길은 깊어졌다가 말랐다가

다시 깊어진 후 퇴적물이 쌓여서  

한때는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인간이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거듭해서

퇴적물을 걷어내고 다시 물길을 틔웠다.

나폴레옹 때의 일이다.

나폴레옹이 부르게에는 좋은 일도 했다.

거리 곳곳에서 발견되는 강박적이고 치열한 꼼꼼함

그리고 결집된 사유의 흔적이 쌓여있는 도시.


스페인 지배를 받던 당시의 영향으로

아라곤, 발타짜르 이런 이베리아식 이름을 내건

호텔과 레스토랑, 상점들이 눈에 띄었다.

벨지움의 이웃인 네덜란드의 국가는 아직도

"나는 네덜란드의 혈통 오라네 공,

스페인왕에게 충성을 다해왔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오라네 공은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를 독립시킨 왕임에도

스페인에 충성했던 시절을 그대로 노래하고 있으니...

캔슬컬쳐의 무풍지대, 재미있는 나라다.

어느 시대, 어떤 일에도  공과는 있는 것이고

있었던 일은 있었던 일이므로 껄끄러운 역사라 해서

부정하고 잘라내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상업적인 실용 건물들은 외부에서 보아서는

벽 위로 난 창문과 예쁜 박공의 지붕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 담백하고 수수한데

내부는 끊임없이 리노베이션하고 현대화해서

아기자기하고 개성이 뚜렷하다.  


날씨는 크로커스 무스카리 수선화를

일제히 잠깨울만큼 좋아서

호텔의 실내가 춥지는 않았으나

호텔의 베스룸 마다 설치되어

현대식 레디에이터가 재미있다.

겨울은 그렇게나 혹독한 것일까?  

 

오래된 것들을 고스란히 보전하며

닦고 가꾸고 유지하는 질서

아침을 여는 풍경은 지하 주차장의 물청소 흔적과 락스 냄새

청소를 마친 마켓 광장의 물기가시지 않은 돌바닥.

800년이나 된 도시의 거리는 이끼가 옅게 끼어있을 망정

어느 구석도 사람이 남긴 부스러기로 지저분하지 않다.  




예쁘고 무난해서 들어간 다이닝

우리가 첫 테이블이었고, 젊은 사람들이 올 것 같았지만

연세가 있으신 부부들이 차례 차례 등장했다.

우리가 제일 젊은 테이블이었던

브루게의 빨간 레스토랑.


북해의 굴을 먹으러 왔건만, 몇 번 시도한 굴은

휴스턴에서 먹던 것 보다 낫다고도 할 수 없고

한국의 굴보다 낫다고도 할 수 없는 그냥 깨끗하기만 한 맛.

굴과 함께 먹을 호스레디쉬를 달라고 하자

친절하던 어린 웨이트리스의 눈빛은  아연해졌다.

굴을 호스레디쉬랑 먹겠다니.. 오..노.. 어느나라 법이지?  

그런 법은 없다는 듯  단호했던 그녀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대들의 법칙이 그러시다면...   뭐 어쩌겠어요.

단 한점의 관자 요리와  에피타이저는 인상적이었으나

음식에 있어서는 다시 한번 휴스턴의 조용한 승리.

그러나 맛과 음식에 있어 뉴욕을 따라올 도시는 없다.

델리케이트한 문제를 푸는 기분으로 먹는 뉴욕의

요리는 창작품이므로.

   

잔을 나누지 않는 플랑드르의 이상한 상식.

1인 1병이 상식인가보다

KLM 기내에서 와인을 마시겠다 했을 때

180ml 짜리 한 병을 주었고

호텔에서 커피를 달라고 했을 때도

한 팟을 그냥 놓고 갔다.  

둘이 한 팟을 다 나눠 마시고

커피 한 잔을 더 달라고 했을 때도

다시 가득채운 한 팟을 가져다 놓고 갔다.

호텔 용품들도 죄다 미니사이즈로 1인 1병이었다.  

시원 시원한 사람들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관공서와 상업 건물들을 생각했다.

북미 관공서와 쇼핑몰은 얼마나 황량하고 만만해 보이는지..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부딪힐 기회가 없다면

그 실내의 견고함과 시스템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얼마나 많은 숨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 수 없다.

여행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엄격한 질서와 프로토콜.


중세의 부르게 실용건물들의 표리부동한 실내와

한국의 화려한 공공 건물은 대조적이다.

뉴욕의 5번가 백화점 조차도 한국의 백화점과

반짝이는 테라조 바닥 위로 향수 냄새 은은한

강남역에는 한참 못미친다.

누군가는 한국에선 정서적으로 허기 진 영혼들이

백화점을 떠돈다는 우스개 소리를 하는데

서울의 공공 건물과 거대한 상업건물의 휘황찬란한 외양이

이용객들에게 은근한 위압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집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회와

집 밖에서 행복을 찾는 사회의 차이를 생각했다.

내 담장 안에 주어진 행복을 가꾸는 마음과  

남의 마당의 더 푸른 잔디를 곁눈질 하는 마음.

그리고 그 간극이 빚어내는 상이한 현재의 풍경에 대해서도.  

골목 끝 하얀집이 우리의 임시 거처.

3층을 통째로 쓸 수 있었던 건 여행의 시기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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