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큐리와 가을
일과 생활, 그리고 여가 활동 사이의 철저한 공간 분리는 텍사스만의 특징은 아니겠지만 이른바 '자동차 문화'가 발달한텍사스의 가장 주된 특징이라 할 것이다. 하늘로 솟아오르는 하이웨이에 올라 순도 100%의 햇살아래 하얀 솜사탕처럼 떠있는 구름 속을 행진하는 드라이브는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완성형이다. 휴스턴에서만 가능한 이 비행 같은 질주를 30분쯤 하다가 지상에 내려앉으면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 야외극장을 만난다. 야외 극장을 중심으로 박물관과 미술관, 대학 캠퍼스의 붉은 테라코다 지붕이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세계 최대 규모의 메디컬 센터가 위치한 휴스턴의 정중앙에 도착한다.
지난주에는 체임버 오케스트라 '머큐리 바로크'의 공연이 있어서 오랜만에 야외극장을 찾았다. 머큐리 바로크를 따라 콘서트홀과 야외극장을 찾는 것도 20년 동안 해온 가을 이벤트 중 하나다. 변하지 않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멤버들은 반갑지만 레퍼토리는 좀 넓혔으면…
봄의 시작과 함께 다운타운의 야외극장에서는 오페라, 심포니, 재즈, 연극을 필두로 각종 공연이 매주말 무료로 진행된다. 그중 가장 화려한 공연은 언제나 7월 4일의 공연이다. 차이코프스키의 1812 overture에 맞춰 축포를 발사하는데, 지겨울 정도로 긴 시간을 불꽃을 쏘아대는 연례행사다.
무대 양 옆의 출입구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흘러내리는 거대한 가지를 지닌 오크나무가 마치 무대를 지키는 호위무사 같은 느낌으로 서있다. 저렇게 가지가 늘어진 오크가 터널을 이루면 남부정취가 거리에 가득하다. 자연사 박물관과 현대 미술관, 그리고 스페인 건축의 분위기가 물씬한 대학 건물들과 함께 야외공연장 주위로 펼쳐져 있다.
엄청난 운명같은 이름, 리치 킨더
미술관 부속 아트 인스티튜트 건물의 옥상에서 내려다본 "낸시와 리치 킨더" 신관건물은 굴곡진 커튼으로 감싼것 처럼 보이거나 길쭉한 형광등을 묶어서 세눠 놓은 것 같아 보인다. 무척 채광이 좋은 신관의 실내는 계단을 제외하곤 직선이라곤 없다. 하얀 종이를 가위로 구불구불 오려만든 것 같은 재미난 실내 건축은 그 자체로도 볼거리다. 신관 맞은편에 길을 건너면 구관이 두 채 나타나는데, 한 채는 고대와 바로크, 19세기까지의 주요 회화 컬렉션이 전시 중이고 다른 한 채에는 엄청난 양의 아프리카 황금과 인도네시아 황금을 비롯한 아시아 미술품이 전시중이다. 인도네시아가 원래 황금의 땅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에서 나는 금은보화가 그렇게나 많다는데 우선 놀랐고, 미술관 하나를 채울 정도로 많은 양을 수집할 수 있었던 개인의 능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평생 모은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는 그 귀결에 고개를 숙인다.
현대적 외양의 신관건물은 현대 미술로 가득하고, 외벽을 감싼 근사한 형광등은 밤이면 불이 켜진다. 건물 전체가 발광하는 형광등 묶음처럼 보이거나, 건물 외벽에 커튼을 드리워 놓은 것처럼 보이는 건물은 리치 킨더 Rich Kind-er를 비롯한 부자들의 기부로 건축되었다. 리치 킨더는 텍사스에서 캐나다로 이어지는 송유관을 보유한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름이 rich에 kind-er라니! 운명이 정해져 있던 이름이었던가. 그러고 보면 저 불 켜진 형광등이 송유관 파이프일지도...
지하 주차장에서 더 깊은 지하 입구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설치작품은 다름 아닌 경복궁의 샛문을 연상시키는 서도호의 집 시리즈의 일부다. 하늘하늘한 갑사로만 집을 지어 공중에 띄우다가 이번엔 견고하고 딱딱하고 무거운 아크릴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문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는 합당한 위치 선정이나, 작품의 섬세성으로 볼 때는 좀 더 환하고 사려 깊은 위치로 옮겼으면 빛났을 듯하다. 어두운 입구가 아니라 고요하고 환하고 품위 있는 무대 중앙으로 이동해야 한다.
나도 서도호 작가의 팬으로 대중들에게 그의 미학과 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강의를 해왔지만, 휴스턴의 미술계는 특히 백인 여성들 사이에는 서도호 작가를 추앙하는 분위기가 있다. 주제의식과 철학이 한눈에도 돋보이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센슈얼한 설명을 듣다 보면 그녀들이 왜 스님 같은 서도호 작가를 추앙하는지 금방 수긍이 된다.
같이 피클볼을 치는 동료중에 한살 많은 일본계 미국인 사진 작가가 있다. 서도호님과 한때 같은 갤러리 소속이었는데 그 갤러리의 엄청난 상업성이 감당이 안되서 나왔다고 했다. 그의 말에 나는 당신도 머리를 빡빡 밀어보는것이 어떻겠느냐고... 적어도 휴스턴에서는 먹힐지 모른다고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문제는 주제와 전달력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안다.
아크릴로 지어진 경복궁의 샛문을 등지고 돌아서면 신관의 입구로 이어지는 올라프 알리아슨의 터널이 나타난다. 머릿속이 리부팅되는 기분을 느끼며 인류의 조상이 된 기분으로 노란빛으로 가득 찬 터널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옷과 소지품은 죄다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변하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자체 발광하는 애플와치 속 스누피의 재롱은 여전하고 아이폰은 제 색을 잃지 않는다. 스스로 발광하는 것들만 색을 유지하는 터널.
지하에 있는 세 개의 빛의 터널이 지상에 있는 네 채의 미술관 건물을 연결하는데, 각 터널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처음 지어진 지하 터널은 구관 두 채를 연결하는 전위적인 런웨이 무대 같은 the light inside 내면의 빛,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다. 마지막에 지어진 이 터널, 머릿속을 리부팅시키는 노란빛 터널이 대륙적 스케일의 송유관을 소유한 리치 킨더가 지은 건물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이것은 지하에 매설된 석유 파이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송유관을 떠다니는 화석연료의 알갱이들일지도 모른다는 비약을 하게 된다.
송유관의 지상에는 왠지 허전한 조각 공원. 미로와 마티스와 헨리 무어가 굴러다니고, 위대한 아니쉬 카푸어의 쌀알모양으로 생긴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이 사진 속, 헐벗은 여인 뒤, 담장 너머에서 빛나고 있다.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의 the bean에 대조되는 스케일이다.
왜 그랬어...
예술은 도처에...
아이들이 어렸을 땐 주말 아침이면 미술관에서 학기제로 운영하는 예술학교에 데리고 다녔다. 일년 전에 미리 대기하고 있어야 자리를 배정받는데, 큰 아이는 입학이 닿았고 작은 아이는 순번에서 밀려난 탓에 아빠랑 갤러리에서 직접 그림을 따라 그리는 본의 아닌 하드 트레이닝을 하면서도 재미있게 놀았다. 완만하게 경사진 건물의 지붕 위에 공원을 만들어 놓은 것도, 시민친화적인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는 모습도 이 모두가 석유회사들이 사회에 이윤을 환원하는 방법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칼럼을 쓸 때면 나는 종종 미술관의 라이브러리를 찾곤 한다. 미술관의 도서관은 장식용으로 보이는 화려한 책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사서에게 작가 이름을 주고 책을 찾아달라고 하면 가끔은 스페니쉬나 불어로 된 책들을 꺼내 오기도 한다… 그럴 땐 대략 난감하지만 그림책이라 텍스트가 많지 않기에 다행이다. 아이폰으로 스캔해서 번역기능을 돌리면 몇 페이지 정도는 대충 읽을 수 있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읽다 보면 집중력은 떨어지고 찾아진 몇 가지 키워드로 구글에게 물어 페이지를 번역하는 편이 낫다.
구글 크롬의 페이지 번역 기능은 매우 쓸만하다. 책을 쓰면서 외국 자료들을 찾아 읽는 방법은 이것이다. 유럽어 기준으로 보면 한국어가 고립어라 영한 번역은 읽을만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하지만, 영어와 유럽어 사이의 번역은 완벽에 가까워 보인다. 유럽어 자료들을 영어로 돌려 읽는다.
저 폭신하고 감각적인 일인용 의자는 특히 랩탑을 무릎에 놓고 작업을 하기에 아주 편리하다. 칼럼의 주제와 상관없는 소설을 읽는데도 구글 크롬은 도움을 주는데, 예를 들면,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소설 “bruges la morte”를 펼친 뒤 불어로 쓰인 이 페이지를 영어로 전환하면 완벽하게 아름다운 영어소설로 번역이 완성된다. 조지 로덴바흐가 쓴 19세기말 암울했던 도시 브루게를 정확하고도 시적으로 묘사한 짧은 단편이다. 로덴바흐의 중세 도시에 관한 묘사는 전성기를 다시 맞은 현대의 브루게의 느낌까지도 정확하게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Cities especially thus have a personality, an autonomous spirit, an almost exteriorized character which corresponds to joy, new love, renunciation, widowhood. Every city is a state of soul, and by barely staying there, this state of soul is communicated, propagated to us in a fluid which is inoculated and which we incorporate with the nuance of the air."
---bruges la morte
로덴바흐라는 낯선 이름의 작가는 시와 소설의 경계를 허물면서도 불쉿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외형에 관한 사실과 그에 대한 주관적 감성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언어의 장인이었다. 시인들에게 언어란 목적이고 과학자들에겐 언어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언어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한다. 수렴과 발산. 시인들의 작업은 자기 만의 언어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언어로 펼친 사유와 감성으로 세상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인데, 로덴바흐는 그 점에서 감탄스러운 extraordinary 다.
요리와 소설은 기본적으로는 같은 작용을 한다고 믿는다. 요리가 좀 더 절대적인 필요성을 갖긴 하지만... 요리는 물질을 재료로 감각차원에서, 소설은 언어를 재료로 추상적 차원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의 차이일 뿐 they both nurish our body and soul. 그런 점에서 미술관 카페의 긴츠키를 연상시키는 금실로 장식된 접시는 그 일 nurishing을 거든다. 핑크색 디저트는 유치해 보였지만 생화의 꽃잎을 뿌려 놓은 진심과 진정성에 웃음.
추석이란 달이 유난히 크고 예쁜 저녁이고 세상에 흩어진 가족들과 지인들이 생존과 근황 소식을 주고 받는 기분 좋은 날 정도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흐뭇한 추석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