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texas state of equilibrium
기온이 19도까지 떨어지는 아침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불현듯 닥친 소슬바람에 땀은 흐를 사이도 없이 말라버렸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는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았다.
코트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하얗게 입김을 내뿜는 장면이 이국의 풍경처럼 낯설었다
겨울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고대의 잊힌 도시를 발굴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밤 녹초가 되도록 운동을 하고,
공을 쫓아다니다 땀에 흠뻑 젖어
하루를 마감하는 날들이 계속되면,
여름 이외의 계절을 잊어버린다.
더블 듀스에 이어 세 번째 세트를 12-14로 팽팽하게
경기를 마무리 한 저녁. 가쁜 숨을 들이킬 때
노란 별들이 뾰록뾰록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맴돌았다.
세 시간을 뛴 것 같았던 한 시간의 경기.
케빈이라는 이름의 중환자실 간호사와 인사를 나눈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가 경기 끝에 내게 madame이라는
약간 낯선 존칭으로 인사를 했던 이유로
그가 10년 전에 파리에서 학생 신분으로 이곳으로 날아왔고,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라는 것과
휴스턴에서 매우 만족한 삶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리에서 여름 나기와
쉥겐 조약의 편리성과 느슨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 비하면 경찰국가를 방불케하는
미국의 엄격한 질서에 대해 동의를 했고,
반대급부로 누리는 삶의 편의성과 단정함에 대해서도
의견이 일치했다.
키가 무척 컸던 그는 나이에 비해 젊쟎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앞 날에 더 많은 기쁨이 함께 하기를 빌어주었다.
간혹 찾아오는 이 여름의 지루함까지도 음미할만했고,
평화롭던 모든 날들이 좋았다.
나는 여름 안에만 머물렀고,
시간을 앞으로 서둘러 가지도 않았고,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뒤돌아가지도 않았다.
this is texas state of equlibrium, so to speak...
imaginary travels into the winterland
그러다가 한없이 평평한 이 평지에서
boredom attack 이 엄습할 때 쯤이면
스웨덴 사람 라스 다니엘슨의 여행 이야기를
담은 재즈를 듣곤 한다.
지리적 상상력과 지역의 현장감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림처럼 생생한 음악이 귓가를 흘러 다닌다.
거위 등에 올라타고 여행을 떠난 <닐스>가 된 기분으로
첼리스트이자 작곡가인 <라스>가 연주 여행을 다닌
유럽과 이베리아와 아랍의 도시들을 느낀다.
귀로는 '라스 다니엘슨'을 듣고,
눈으로는 '빌 브라이슨'의 졸음을 확 깨우는 유머 그득한 여행기를 읽는다.
닐스의 모험은 지리적 사실과 동화적 상상력을
엮은 교육용 동화였다.
작가 셀마 라겔뢰프가 지리 교육용으로 쓴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것은 마법에 걸려 다람쥐만큼 작아진 '닐스'도
근사한 첼로 음악을 연주하는 '라스'도 , 그리고
닐스의 이야기를 지어낸 "셀마 라겔뢰프"도 스웨덴 사람들이라는 점.
여성 작가 셀마 라겔뢰프는 1909년에
이 <닐스의 모험>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빌 브라이슨 덕분이다.
빌 브라이슨이 스칸디나비아 출신인 부인과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하면서
신랄하게 그 겨울나라들을 까내리는 도중에
오래된 셀마 라겔뢰프의 기억을 소환한다.
겨울 나라의 여성 작가들은 서사와 스토리 텔링에
독보적인 능력을 가졌다. 여성 문해력의 역사가
길었을 뿐 아니라,
아마도 긴 겨울과 긴 밤이 그 이유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빛도 온기도 조금 부족할 때 우리의 생존본능은
부족한 것들을 충족시킬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쓴다.
겨울이 품은 날카로운 감수성은
졸고 있는 뇌를 일깨워 팽팽 돌아가게 만들고
길고 긴 밤을 지나기 위해선 상상력의 날개를 펼칠 수밖에.
바로 그런 이유로 내 마음은 줄곧 겨울 나라에 속해 있었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는 것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
그리고 겨울에 떠오른 생각들은 대체로 추진력을 동반한다.
그래서 나는 겨울 나라의 시민을 자청하고 있었던 것인데
어느덧 여름 나라의 무사안일을 만끽하며
계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in between the season of EQUILIBRIUM and CRAVING
19도의 아침 기온이 다시 30도를 향해가던 시간에
나는 서재의 소파에 기대 창 밖의 오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크가지가 우산처럼 잔디밭을 덮어 그늘을 드리웠다.
높은 바람이 쉼 없이 불었고
나무는 통째로 너울거렸다. 너울… 너울…
쉼 없이 천천히 너울 너울대는 나무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내 몸이 바다 위에 둥둥 떠서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바람이 거대한 가지를 뒤흔들때마다 숫한 잎사귀들은
애트르타 앞바다의 자갈돌이 부딪히던 소리와 같은
파도 소리를 냈다. 솨이솨아 차르르르르
그 짙은 초록 잎사귀들의 일렁임이
서재를 한 순간에 망망대해로 바꾸어 놓는
몽환적인 느낌은 살짝 멀미가 일었다.
나는 이웃들이 오크나무가 키가 크지 못하게 잘라대고
가지를 뻗어가지 못하게 싹둑싹둑 잘라대는 것이
사실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들은 실용적이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가 내릴 때마다
마당 가득 쌓이는 노랗고 파란 잎사귀들은
빗질로 쓸어 담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하지만 높은 바람이 심하게 불때면 나의 키 큰 오크나무가
파도소리를 내면서 일렁이는 바다로 변신하는 것은
나만 아는 비밀이다.
떨어져 쌓이는 잎사귀가 귀찮기는 하지만
나무에서 바다를 만나는 기적을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다.
거대한 오크가 집을 엄호하고 그늘을 드리워
서재는 블라인드를 열어두지 않으면 충분히 어둡다.
서늘하고 낮에도 살짝 어두운 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해
서재의 블라인드를 아주 가끔씩 열어둔다.
눈이 아프도록 투명하고 티끌하나 없이
맑고 뜨거운 햇살을 피해
숨을 공간이 하나쯤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텍사스의 여름을 수놓는 장관은
crape myrtle tree가 만개한 동산.
장수를 상징하는 머틀 트리가 한국에선 백일홍 나무로 불린다. 장수와 백일홍은 longevity 라는 의미가 통하긴 하지만
나는 잠시 꿔다붙인 이름같은 “백일홍 나무”라는 이름이 내키지 않는다. 백일홍 꽃이 있는데 왜…백일홍 나무란 말인가.
“백일홍 나무”라든지 더 급하게 둘러댄 “배롱 나무“ 같은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
몇 그루 나란히 서면 마치 작은 동산처럼 커지는데,
그 장관은 카메라에 담지 못할 만큼 풍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