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으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 남부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며
엑상프로방스에 닿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뉘베롱 산맥의
이산 저산 뛰어 다니며 중세의 마을들을 방문하고
물 맑은 계곡에 자리한 시인의 마을도 방문했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이탈리아 시인이 자라난
계곡의 작은 마을입니다. 퐁텐 드 보클리주.
보클리주 샘이있는 마을에 들어오니 석회석이 하얗게 드러난 산의 절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절벽을 가만히 보면 둥그런 구멍이 나 있는데
구멍마다 도사 할아버지가 한 분씩
가부좌 틀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 높은 절벽에 저런 구멍이 있는 이유가 몹시 궁금합니다
물이 떨어져 내린 자린가 싶지만,
산은 나무도 드믄 드문한 민둥 석회산이니
물이 떨어져 내릴리도 없고 신기한 조화입니다.
산 아래 오목히 들어 앉은 마을 광장을 가로질러
큰 계곡이 흘러갑니다.
이 계곡이 소르그 강의 발원지인데,
정말 깨끗하고 물빛이 과장없는 투명한 에머럴드빛입니다.
강 바닥에 에머럴드 광석이 들어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초당 9만 리터가 쏟아져 나온다는데,
어떻게 측정했는지 정확한 정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클루즈 샘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깊은 자연 샘 중 하나로,
초당 평균 약 22,000리터, 강수량이 많아질 때는
초당 약 90,000리터이상 증가합니다.
그 많은 물이 어디서 솟아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 마을을 대표하는 유명인이
바로 이탈리아 계관 시인이었던 페트라르카.
이탈리아의 시인/학자로 르네상스의 선구자입니다.
중세를 "다크 에이지" 암흑시대로 정의했던 분이 이분
“다크 에이지”라면 무척 로마중심적인 견해이지만,
유럽이 고대의 그리이스-로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해지지고 얼어붙었던건 사실이니까요.
페트라르카는 원래 플로렌스 출신이지만
교황청에서 일하던 법률가인 아버지와 함께
교황의 아비뇽 유수 때 이 자연으로 옮겨 옵니다.
그리고 아비뇽 인근의 산좋고 물좋은 보클뤼즈 성장합니다.
이분이 서른이 넘어서야 그 위대한 “로마"에 가봤더니
게르만이 할퀴고 간 망삘이 낭낭한 로마의 현재에
비애를 느끼면서
“로마의 소년이여 일어서라...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하라 ”
이런 서사시를 쓰셨다고 합니다.
시인은 역사가이자 예언자의 역할도 해야하는 것임을
보여주신듯.
1304년 생이고 몽펠리에 대학과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우리에게 친근한 유명한 문인 예술가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분 역시 법공부는 했으나
법률가 되라는 아버지 말씀을 안듣고
라틴어로 된 고전문헌의 세계에 투신하여 읽기에 힘쓰시고
여기 저기 세상 여행다니면서 견문을 넓히고
역사 공부하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자아성찰 하십니다.
현대인이죠. 니체 선생님도 이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큰 호흡으로 역사를 관망 조망 하시고
시를 쓰고 읊고, 독신으로 일생을 보낸 엘리트 선비입니다.
유부녀 라우라 드 노브를 짝사랑하며 사랑시도 많이 썼지만
그녀는 페스트에 죽고 말았습니다.
두 대학에서 공부하며 라틴 문헌에 투신한 내공으로
그리스와 로마 고전 연구로 르네상스 부흥에 일조했습니다.
특히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을 꺽고
카르타고를 초토화 시키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던
이탈리아의 스코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서사시 아프리카를 지어서 계관 시인으로 등극합니다.
신곡을 쓴 단테 다음 세대이고,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와 같은 세대입니다.
단테는 토스카나, 플로렌스 지방어로 신곡을 썼고,
이분 페트라르카는 라틴어 덕후이니
두 사람이 이탈리아 문학의 견인자들이긴 해도
언어적 지향도 성격적인 결도 다르겠지요.
페트라르카 뮤지엄이 있는데,
역시 암석을 뚫고 들어가
뮤지엄의 마당으로 들어가면
마을 광장에 있을때와는 온도가 달라집니다.
비수기라 개관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건물 양 옆으로 사이프러스가 길게 늘어선 풍경이
이탈리아 느낌이 조금 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프로방스에서 가장 좋았던 지역입니다.
곳곳에서 도사들이 출몰할 것 같은 물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