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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May 09. 2022

타인을 위해 ‘헌신’했다는 착각

우리는 진정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일까?

우리는 진정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일까? 우리가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런 전제에 의해서 만이다. 그런데 타인이 제시하지 않은 목적을 내가 스스로에게 제시하고, 그 목적이 바로 나의 목적이라면, 나는 결코 헌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행위를 하는 것일 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희생, 헌신'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자유가 침범당하지 않는 선에서 타인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완벽한 헌신도 없었고, 철저한 이기주의자도 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 동생들을 위해 내가 희생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멋대로 군림하는 언니였고, 동생들이 정작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우리 자매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어른들 밑에서 스스로 컸기에 헌신의 숭고함에 대해서 경험할 기회가 없었지만 자유의 달콤함과 쓴맛에 대해선 알았다. 어른들의 간섭과 제재 없는 자유는 그만큼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지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타인에게 얽매이지 않고 본연의 나로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친구들 대부분은 부모의 헌신으로 인해 부응된 기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강요받는 환경에 놓여있었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자신의 자유와 부모의 희생을 저울질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어렸을 땐 그토록 갈망하던 부모의 헌신을 받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선택을 하고, 무슨 결정을 하든 그것은 오로지 나의 것, 나의 책임,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고, 오롯이 나만이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지는 삶을 덜 책임지고, 덜 희생하고, 덜 헌신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그리워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지 않은 건 자유로운 삶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책임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다. 책임감은 희생과 헌신을 배양분 삼아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지는 특성을 지녔다. 책임감 강한 사람들이 유독 억울함을 많이 느끼는 것도 그만큼 희생하고 인내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이것뿐이라는 보상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자와 희생한 자의 희생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거나 혹은 희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자의 괴리감을 우리는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헌신을 받은 자의 마음은 측정 불가하다. 상대를 위해 열 가지를 배려하고 인내했다 하더라도 상대가 전혀 그런 배려나 양보를 느끼지 못했다면 방법이 잘못됐거나 누구 하나는 이기적이거나 아니면 정말 그것을 바라지 않거나 하는 식의 주관적 감정의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의 주관적인 성향이나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헌신을 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볼 수는 있다. 진정 현재 내가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헌신의 목적이 ‘타인의 행복’에 있는지 아니면 ‘나의 목적’에 있는지를 체크해 보면 된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아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점심 메뉴를 고를 때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먼저 따로 먹겠다 하면 그걸 편하게 생각하는 동료가 있는 반면 부러 억지로 메뉴 선정을 나한테 맞추면서까지 같이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는 사람의 경우라면 후자라도 마음이 편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동료의 의리상, 혹은 분위기상 같이 먹자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엔 ‘점심시간 메뉴나 회식 메뉴 선정도 마음대로 못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희생했는데…’ 라는 험담으로 양상 될 때가 많았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을 겪어 화가 많이 난 적이 있다. 요청한 적도 없고, 배려받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새로 들어간 프로젝트에 팀원으로 데리고 들어간 A가 나 때문에 희생한 것이 많다며 억울해했다. 점심메뉴에서부터 내 기분을 살피며 일하느라 피곤했다는 것이 A의 이야기. 나는 나대로 억울했다. 점심시간에 먹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메뉴에서부터 업무상 일정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나 기분이 확확 바뀌는 A의 태도 때문에 스트레스도 심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이 참았기 때문이다. 내가 좀 더 높은 지위에 있었으므로 밥이나 차를 살 때 쓰는 비용도 더 많았다. 서로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고 A가 프로젝트에서 하차함으로써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지만 A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억울해 며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A가 괘씸했지만 그 나름대로 억울하다고 하니 그건 그자의 심정이라 차치하고서라도 나의 억울함에 대해선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몰라 그저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 때였다.


물음은 갑자기 생겨났다. 들끓던 분노가 미지근해지고 일상에서도 안정을 되찾아갈 즈음 분노의 원천인 이 억울함이 과연 객관적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나를 분노로부터 멀어지게 해 주었다. 보부아르의 말대로라면 내가 A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사실, 나를 위한 것이었다. 새로 들어간 프로젝트를 잘 이끌고 싶어서, 팀원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분위기를 흐트러트리고 싶지 않아서, 다양한 목적들 때문에 억지로 시간을 보내고, 돈을 쓰고, 먹기 싫은 메뉴를 먹었다. 상대가 그것을 바라거나 나에게 요구한 적은 없다. 모든 것이 상대가 이렇게 하면 좋아하겠지, 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행위였을 뿐이다. A가 나를 위해 배려했다고 하지만 나는 배려받은 기억이 없고, A를 위해 나는 희생했다고 생각했지만 A는 전혀 그것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배려했다고 주장하지만 어쩌면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행동했다는 것을 배려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상대를 위해 헌신했다고 착각할수록 억울함은 더욱 커진다. 진정 타인의 행복만이 헌신의 목적 전부라면, 억울함은 틀린 결론이다. 억울함이 생겼다는 것은 헌신의 목적이 ‘타인의 행복 아닌 ‘나의 목적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렸을 땐 누군가의 희생이나 헌신을 간절히 바랄 때도 있었다. 그런 희생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연민하던 적도 있었다. 타인의 희생이 나의 행복과 무관할 수 있음을 알게 된 나이가 되었을 땐 타인의 헌신 대신 행복을 바랐다. 타인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을 타인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내가 타인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헌신으로 타인이 행복하다면 나도 덜 억울할 것 같았다. 타인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지금엔 헌신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희생하고 인내하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 헌신이 아니라 헌신은 ‘타인은 무엇을 통해 행복해할까…’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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