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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Mar 29. 2022

고요의 필사(1)_ 볼프강 보르헤르트 <이별없는 세대>

우크라이나 러시아 침공에 대한 애도를 담아.

보통 집중해서 무언가를 읽거나 써야할 때 음악은 호흡처럼 매순간을 함께 했다. 운전이나 청소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는 작업을 할 때도 음악은 비어있는 여백을 채워주듯 산만한 집중력을 하나로 모아주는 역할을 충실해 해냈다. 그런데 어떤 책들은 이런 음악조차 방해로 느껴지게 할 때가 있다. 완벽한 고요와 밤의 정적만이 내려앉은 시간 속에서 읽어야만 이해가 되는 책 말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없는 세대>가 그랬다. 작년 여름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10쪽도 읽지 못한 채 멈춰 있던 책이다. 은유와 비유로 쓰인 짧은 단편들이 시처럼 엮어있는 이 책은 이상하게 작년 여름엔 난독증을 의심할정도로 지독히 안 읽혔다. 침대맡 작은 책상에 그날 그날 읽을 책들이 겹겹히 쌓여 작은 탑을 이루고 있을 때에도 이 책은 언제나 탑에서 최상위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매일 밤 나의 선택은 받지 못했다. 그렇게 반년이나 홀로 고독히 자신의 존재를 지키내고 있던 이 책은 우울하지 않은데 기쁘지 않고, 아프지 않은데 피곤하고, 외롭지 않은데 쓸쓸한 날에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누우려는 내게 제 몸을 던졌다. 침대 위로 떨어진 이 책을 고용한 밤의 소리를 음악 삼아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100쪽에 다다를 무렵 독서를 멈추고 이 글을 쓴다. 책을 한 권 다 읽지 않았는데도 이 글을 쓰는 건 이 아름다운 문장들을 이제서야 이해했기 때문이고, 필사로 남기지 않는다면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한 권을 다 읽는 행위보다 문장 한 줄 한 줄을 음미하고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한 책이므로 어떤 방해도 없이 고요 속에서 필사를 시작한다.


너는 길을 잃는다. 어둠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어둠에서 너는 벗어날 수 없으며 어둠은 너를 순식간에 압도한다. 어제 네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기억으로 너를 엄습한다. 내일 네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기억으로 너를 엄습한다. 내일 네가 저지를 살인에 대한 예감으로 너를 덮쳐든다. 그리고 어둠은 네 안에서 비명을 키운다. 자신의 바다에 압도당한 고독한 짐승이 내지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물고기의 비명을. 그 비명은 네 얼굴을 갈가리 찢고, 그 안에 공포와 뚝뚝 뜯는 위험으로 가득 찬 구덩이를 만들어 다른 이들을 경악하게 한다. 자신의 바다에서 고독한 짐승이 내지르는 무시무시한 어둠의 비명은 그토록 적막하다. 그리고 밀물처럼 불어나 부서지는 파도처럼 검게 흔들리며 솨솨 거린다. 거품처럼 부서져 사라지면서 솨솨거린다. (p.16 ‘여기 있어줘요, 기린’ 중)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세계2차대전 참전 군인으로 독일측 병사였다. 군생활 중에도 반정부 발언이나 글들 때문에 군사재판에서 사형까지 언도받았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면 받고 갖은 질병과 감옥생활의 휴유증으로 전쟁중에도 병원을 전전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 군의 포로로 잡혔다 탈주하여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47년 병으로 26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병상에 있는 그 2년 간의 기간에 집필된 것으로 삶과 죽음, 전쟁 중에서 그가 경험하고 본 것들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이지만 서사적이기 보다는 시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단어와 문장간의 서사적 관계로는 파악하기 힘든 문장들이다. 함축적 의미와 은유가 가리키는 원관념을 찾아서 읽어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은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음악보다 고요가 이 문장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적막한 고요속에서 문장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보면 70여년전의 글인데도 현재가 읽힌다. 삶과 죽음이 파리 목숨처럼 하찮아지는 전쟁에서 느낀 작가의 고뇌와 절망이, 슬픔이, 75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이렇게 절절하게 와 닿는 건 20세기의 전쟁이 21세기인 지금에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차피 바보들이야. 문가에서 팀이 말했다. 우리 남자들은 모조리 다 바보들이라고. 우리는 술과 재즈와 철모와 여자가 있고, 집과 만리장성과 등불이 있지. 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두려움을 이기려고 우리는 그것들을 소유하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바보들이지.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사진을 찍고 두려움 때문에 아이를 낳고 두려움 때문에 여자들 품속으로 파고들지, 항상 여자들 품으로 말이야. 두려움 때문에 기름에 심지를 담가 불을 붙이지.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바보들이야. 이 모든 걸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려고 하는 거야. 철모를 쓰는 거도 두려움 때문이야. 그러나 이 모든게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우리가 실크 속치마나 밤꾀꼬리의 신음 소리에 빠져 우리 자신의 삶을 잊는다 해도, 어느새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거든. 그 순간, 두려움은 어디선가 기침을 하고 있어.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하면 철모도 소용이 없어. 그러면 집도 여자도 술도 철모도 아무 소용이 없는거야. (p.25 ‘밤꾀꼬리가 노래한다’ 중)
그들은 꼭 우리 같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잘 견뎌낸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철로에서 쓰러지거나 정지하거나 어느 중요한 기관을 잃고 만다. 그들은 항상 어디론가 가려한다. 결코 한 곳에 머무는 일이 없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끝나고 나면 그들의 삶은 무엇인가? 길 위의 삶, 그러나 그것은 웅장하고 잔혹하고 끝이 없다. 오후와 밤의 열차. (p.32. ‘오후와 밤의 열차’ 중)


팀은 보초를 서러 나가는 길인데도 철모를 가져가지 않는다. 이 밤을 더 잘 느끼고 싶어서라고 하면서 일장연설을 한다. 두려움이 이 모든 걸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두려움 때문에 철모를 쓰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가족을 만든다고 하면서. 그러나 결국 그 어떤 행위로도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하면 우리를 안전하게 해주는 건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다는 냉소를 날리면서 팀은 누렇게 뜬 눈으로 하얀 눈 위에 시체처럼 누워있다. 보르헤르트는 전쟁 중에서도 탈영을 시도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그가 전쟁을 얼마나 혐오하고 증오했는지 그의 연대기를 알지 못해도 문장 하나하나에서 여실히 느껴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이후로 전쟁이 20세기의 지나간 유물이 아님을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깨닫는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며 강대국이 마음만 먹으면 평화협정 따위는 개무시하고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역사깊은 건물들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현장을 따듯하고 안온한 집 안에서 실시간으로 보고 받는 현실에 처해있다. 그런 면에서 보르헤르트가 인간의 삶을 열차와 비유한 저 대목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 요즘 내가 느끼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가, 웅장하고 잔혹하며 끝이 없는 어둠 속을 달리는 열차와 같을 것이라는 이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다.


너 그걸 모르겠어?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내맡겨져 있다는 걸 모르겠어? 저 아득한 것, 이루말할 수 없는 불확실한 어둠에 내맡겨져 있다는 걸? 넌 우리가 그런 웃음에, 슬픔과 눈물에, 울부짖음에 내맡겨져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어? 이봐, 우리 안에서조차 우리 자신에 대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우리가 아버지와 친구, 아내의 무덤 앞에 서 있는데 그 웃음이 나온다면 말이야. 고통을 엿보는 이 세상의 웃음, 애통해할 때 우리 안에서 슬픔을 누르고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웃음에 우리는 내맡겨졌어.

오 이봐, 정말 끔찍해. 슬픔이 우리를 엄습해 자식들의 요람 앞에 서 있는데 눈물이 찢긴 눈 틈새로 스며 나온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신부의 침대 맡에 서 있는데 슬픔이, 검은 삼베옷을 입은 유령처럼 우리 마음속에 차갑고 쓸쓸하게 기어오른다면, 우리가 웃는 순간에도 마음 속에서 그런 슬픔이 고개를 쳐든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어. 우리는 그런 슬픔에 내맡겨졌어.

너 그걸 모르겠어? 이 세상에 번지는 울부짖음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겠어? 잔뜩 겁에 질려 이 세상에 울려 퍼지는, 네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라 포효하는 저 울부짖음 말이야. 밤의 적막 속에서, 사랑의 정적 속에서, 말없는 고독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 그 울부짖음은 바로 조소라고 불린다! 신(god)! 삶! 공포라고도 불리지. 이제 우리는 우리 몸속을 흐르는 모든 피와 함께 그 울부짖음에 내맡겨졌어.

우리는 웃고 있지. 그래도 우리의 죽음은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어.
우리는 웃고 있지. 그래도 우리의 파멸은 피할 길이 없어.
우리는 웃고 있지. 그래도 우리의 몰락은 눈앞에 닥쳤어. 오늘 저녁이든. 모레든.
(p.52-52)
우리는 신도 머물곳도 약속도 확신도 없이 내맡겨지고 내던져져서 버림받은 채 살고 있어.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코와 귀와 눈의 물결 속에서 얼굴 없이 서 있어. 한 밤에 메아리도 없이, 바람 속에 돛대도 갑판도 없이, 창문도 없이, 출입문도 없이 서 있어. 어둠 속에 달도 별도 없이, 폐 결핵에 걸린 것처럼 창백한 가로등에 속아 서 있어. 우리에게는 대답도 긍정의 말도 없어. 맞아줄 고향도 손길도 마음도 없이 암흑에 싸여 있어. 어둠과 안개와 냉혹한 나날에, 문도 없고 창도 없는 암흑에 내맡겨져 있어.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우리 주변에 내맡겨져 있어. 달아날수도 벗어날수도 없지. 그런데도 우리는 웃지.

우리는 아침이 올 것을 믿어. 그러나 그 아침을 잘 알지는 못해. 우리는 아침을 신뢰하고 의지하지. 그러나 아무도 우리에게 그 아침을 약속하지 않았어. 우리는 아침을 부르고 애원하고 울부짖지. 그러나 아무도 우리에게 대답해주지 않아.
(p.62 ‘지붕 위의 대화' 중)


보르헤르트가 하이데거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지붕 위의 대화’ 라는 단편을 통해 더욱 확실해졌다. 하이데거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 신이 부재한 시대, 고향이 상실된 시대에 살아가는 존재들의 불안에 대해서 고찰한 철학자다. 돌아갈 고향이 상실된 기분으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는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거나 혹은 진정한 자아와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불안이 우리를 저 암흑 속에 내던지고 달아날 수 없도록 옭아매지만 결국 아침이 올 것을 믿듯 은폐된 존재와 대면할 기회를 얻고야 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기도 하고, 아침이라 부르기도 하고, 구원이라가 부르기도 한다.

불안과 공포에 압도된 상태에 붙들리지 않고 ‘존재론적 물음’ 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의 '존재론적 해답'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지붕 위의 대화’는 신에게 대화를 청하는 이야기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대화 속에서 신은 부재한 상태다.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고, 죽음으로부터 완벽한 구원을 확신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신은 그저 웃음으로 화자의 울부짖음에 화답할 뿐이다.그래서 화자는 스스로에게 울부짖는다. 돌아갈 고향도 없이, 앞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아침이 올 것을 믿는 것"처럼 우리는 미지의 미래로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해답을 주지 않지만 결국엔 우리 존재 자체가 그 해답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못 떠나요. 위르겐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못 떠나요, 안돼요.
남자는 바구니를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니, 안됐구나. 그는 몸을 돌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때 위르겐이 다급히 말했다. 쥐들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굽은 다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쥐들 때문이라고?
네, 쥐들은 시체를 먹잖아요. 사람들을 말이예요. 그놈들은 그걸 먹고 사니까요.
누가 그러던?
우리 선생님이요.
그래서 넌 지금 쥐들을 지켜보는 거니? 남자가 물었다.
쥐들을 보는 건 아니에요! 아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동생이오. 내 동생이 저 아래 누워 있어요. 위르겐은 허물어진 벽을 막대기로 가리켰다. 우리 집은 폭격을 당했어요. 갑자기 지하실 불이 꺼졌죠. 그리도 동생도 없어졌어요. 우리는 큰 소리로 불렀어요. 그 애는 나보다 훨씬 어렸어요. 겨우 네 살이었으니까요. 그 애는 틀림없이 여기 있을 거예요. 나보다도 훨씬 어리거든요. (p.79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 중)


토끼를 키우는 한 남자가 바구니 한가득 토끼풀을 따서 돌아가는 길에 보초를 서고 있는 한 남자아이에게 말을 건넨다. 자신을 따라오면 27마리의 토끼를 볼 수 있다고 소년에게 권유한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모티브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소년은 움직일 수 없다. 지난 밤 폭격에 집과 동생을 잃은 소년은 쥐들이 동생의 시체를 파먹지 않도록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남자는 쥐들도 잠을 잘텐데 소년도 쉬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소년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준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이 짧은 우화가 얼마 전 포털에서 본 사진 하나를 상기시켰다.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길가에 쌓여있는 군인들의 시체가 드러난 것인데, 장지도 없고 화장터도 모자라서 처치 곤란한 시체들을 빈 건물 지하에 포대자루처럼 쌓여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한 때는 사람이었을 그 몸들이 눈빛도 생기도 없이 도축된 동물의 사체처럼 겹겹이 쌓여있는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죽음이 얼마나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지, 영원할 것 같았던 삶이 폭력으로 얼마나 빨리 파괴되는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에게 깊이는 끝모를 나락이다. 우리는 행복도 없고 고향도 없고 이별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젊음은 젊지 않다. 우리에게는 국경도 없고, 제약도 없고, 보호막도 없다— 그런 우리를 경멸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어린 시절 울타리에서 내쫓긴 세대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모진 바람이 몰아칠 때 우리의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신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이 없는 세대다. 우리는 만남도 없고 과거도 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 발과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거리, 한 길 넘게 눈 쌓인 거리를 헤매는 집시로 만들어버린 이 세상의 모진 바람이 우리를 이별없는 세대로 만들었다. (p.95)
:
우리 삶은 만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만남들은 짧고 이별도 없다. 마치 별들처럼 별들은 서로 가까이 다가가 잠시 함께 있다가 다시 멀어진다. 자취도 없고, 속박도 없고, 이별도 없이.
:
우리는 이별없는 세대다. 마음이 내지르는 비명을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슬그머니 도망친다. 우리는 귀향없는 세대다. 우리에게 돌아갈 곳도 없고, 마음 줄 이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별없는 세대, 귀향없는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도착의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다다르는 도착의 세대다. 새로운 태양 아래, 새로운 마음에 다다르는 도착의 세대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사랑에, 새로운 웃음에, 새로운 신에게 다다르는 도착으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도착이 우리의 것임을 알고 있다.(p.97-98 ‘이별 없는 세대’ 중)


75년 전에도, 75년 후에도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다. 여전히 돌아갈 고향이 없고, 행복도 없고, 신이 부재한 시대에 살아가지만 이 글의 마지막처럼 시작을 통해 도착의 세대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웃음, 새로운 행복, 새로운 평화를 위해 오후와 밤을 열심히 달리는 열차처럼 미지의 도착과 시작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것도 약속받을 수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지만 그러므로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도착이 우리의 것임을 안다. 비극과 슬픔이 나를 압도하고 죽음이 삶의 뒤통수를 후려칠만큼 성큼 다가와도 아침을 기다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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