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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봄여기 Aug 13. 2021

라플란드를 찾아서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들장미가 자라는 언덕 아래

 우리 아기 예수 함께 하시네”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골목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세자매 뿐이다. 방금 전까지 ‘얼음 땡’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엄마의 부름에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세자매는 버스 정류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른다. 여름의 저녁은 다른 계절보다 느리게 오고, 아침은 빨리 온다. 그래서 세자매는 여름이 좋았다. 늦은 시간에 동네를 어슬렁 거려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고, 더위를 피해 밖에 나와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수박을 얻어먹거나 화투 치는 어른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용돈을 받기도 했다. 매해 여름마다 교회에서 개최하는 '여름 성경학교'는 2박 3일 공짜로 재워주고, 먹을 것도 주고, 심지어 선물도 주었다. 여름은 온갖 이벤트와 풍족함이 넘쳐나는 축제 같았다. 세자매는 늘 여름이 오기를 기다렸고,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설렜다.


“언니, 오늘은 엄마가 올까?” 막내가 묻는다. 어둑어둑한 골목에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진다.

둘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한다. "엄마는 이번에도 안 와 바보야."

막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둘째를 흘긴다.

"언니 이제 그만 들어가자... 엄마는 안온다니까. 엄마가 새벽에 몰래 큰 가방 들고나가는 걸 내가 봤다구!"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둘째가 일어선다.

"난 안 들어가, 들어가려면 너나 들어가" 막내가 대꾸하자,

"뭐 너? 언니한테 너라니! 맞을래?" 둘째가 주먹을 막내 얼굴 위로 들어 올리며 위협하듯 윽박지른다.

"그만해. 엄마는 올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버스 정류장 안으로 버스 한 대가 들어서는 걸 지켜보며 첫 째가 침착하게 말한다. 투닥거리며 다투던 셋째와 둘째도 숨을 죽이고 버스 정류장 쪽을 응시한다. 큰 보따리를 들고 내리는 할머니, 그 뒤로 교복을 입은 학생 두어 명이 버스에서 내린 뒤 버스의 뒷문이 닫힌다. 버스가 정류장을 떠날 때까지 세 자매는 버스 정류장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체념의 공기가 무겁게 세자매 주변을 에워싼다. 막내가 조금씩 훌쩍거린다.

"큰언니...정말 엄마가 우리를 버린 거야?" 첫째는 막내의 손을 잡고 언덕을 내려가며 말한다.

"막내야, 엄마는 집을 나간 게 아니라 악마의 거울 조각이 눈에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잊어버린 거야. 언니가 <눈의 여왕> 읽어줬지? 눈에 악마의 거울 조각이 들어간 케이가 어떻게 됐지?"

"심술쟁이가 됐어. 게르다랑 같이 안 놀고 혼자 눈썰매 타고 놀다가 눈의 여왕한테 잡혀가고, 눈의 여왕이 뽀뽀해서 심장이 얼음이 됐잖아."

"맞아! 엄마도 그래서 우리한테 못 오는 거야. 심장이 차가워져서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었거든."

"그럼 내일은 엄마가 와?"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한테 기도하면 엄마가 올지도 몰라." 막내가 신이 나서 두 손을 모으며 말한다.

"그럼 나 지금 기도할래. 내일은 꼭 엄마가 우리를 기억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막내가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채 말한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둘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소리친다.

"넌 그 말을 믿냐? 큰언니 말은 다 개~~~ 뻥이야. 언니가 맨날 읽는 동화책 내용 중 하나라고! 바보 같은 놈." 막내를 놀리며 언덕 아래로 내달리듯 달려가는 둘째를 잡으려고 그 뒤를 첫째가 쫓아간다. 첫째는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둘째를 윽박지르며 뒤쫓아가지만 달리기를 잘하는 둘째는 잡힐 생각이 없다. 언덕 중턱에 혼자 남은 막내는 중얼거리며 기도한다.

"하나님 내일은 엄마의 심장이 따듯해져서 꼭 우리를 보러 오게 해 주세요." 휘영청 한 보름달이 동네를 비춘다.




똑똑똑

아침 8시 이른 시간에 누군가 세자매의 현관문을 두드린다. 첫째가 문을 여니 옆집 준수가 서 있다. 졸음이 덜 깬 준수는 짜증 난 말투로 전화받으러 건너오라고 한다. 전화비를 못 내 전화가 끊긴 후 할머니는 종종 옆집 준수네로 전화를 걸어 우리와 연락하곤 했다. 할머니는 오늘 서울로 엄마를 만나러 가야 하니 1시간 뒤 버스 정류장으로 동생들과 함께 나오라는 말만 하고 끊는다. 드디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신 걸까? 첫째는 들뜬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 자고 있는 동생들을 흔들어  깨운다.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동생들에게 어떻게 전할까 생각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애들아, 우리 엄마 만나러 가자."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 머리를 베개에 묻고 요상한 자세로 자고 있던 막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한다. "엄마?"

잠이 덜 깬 둘째가 손으로 눈을 비비며 묻는다. "어디에 있다는데?"

"라플란드" 둘째와 막내가 동그란 눈으로 첫째를 바라본다. 첫째는 싱글싱글 웃는다.

"지금 여름이잖아. 눈의 여왕이 엄마를 데리고 어디로 갔겠어? 일 년 내내 얼음과 눈이 가득한 곳, 하얗게 반짝이는 드넓은 평원에서 순록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 눈의 여왕이 매년 더운 여름을 피해 가는 곳. 바로 라플란드지! 엄마는 거기에 있을 거야" 둘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찬다.

"언니 빨리 가자! 엄마가 있는 곳은 엄청 시원하겠지?" 막내는 신이나서 말한다.

다시 이불 위로 누우려던 둘째를 첫째가 억지로 일으켜 세워 화장실로 데리고 간다.

"엄마를 만나면 팥빙수를 사달라고 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빙수 빙수 팥빙수" 막내는 자기가 맘대로 만든 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랍장에서 옷을 뒤적인다.

세 자매가 외출 준비를 끝내고 할머니와 만나기로 한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 할머니는 이미 버스정류장 앞에 나와 있다. 세자매는 달려가 할머니에게 안기지만 할머니는 귀찮다는 듯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서울까지 2시간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면서 검은 봉투를 첫째의 손에 쥐어준다. 멀미가 심한 막내를 챙기라는 뜻이다. 버스를 타야 한다는 소식에 막내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라플란드는 썰매를 타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버스 타기 싫어" 막내가 첫째를 향해 볼멘소리를 한다.

"라플란드 가기 전까지 여기는 여름이니까 썰매를 탈 수 없지. 썰매를 타려면 뭐가 있어야지?"

"누우우우운."

"그래. 근데 지금 눈이 여기 있어?" 막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라플란드에 도착하면 엄마한테 썰매를 태워달라고 하자! 그러니 지금은 사탕을 입에 물고 있어 봐. 그러다 정말 토가 나올 거 같으면 언니한테 말해. 알았지?" 첫째는 막내의 입에 사탕을 하나 까서 넣어준다.

"응. 알았어." 막내는 첫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엄마는 막내를 낳자마자 1년도 안돼서 돈을 벌러 나갔다. 종종 집을 비우던 아빠가 아에 집에 안들어오게 된 이후부터는 하루 일당을 많이 쳐 준다는 윗집 할머니를 따라 공사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에 나가서 오후 다섯시가 넘어야 돌아오는 엄마 대신 첫째는 막내를 돌봤다. 막내에게 첫째는 언제나 부재했던 부모님 대신이자 보호자였다. 한 번씩 이상한 고집을 피우며 울고 불고 하는 막내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첫째였다. 둘째는 그런 막내가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째를 믿고 자기에게 까불고 대드는 막내를 언젠가는 크게 혼쭐을 내주리라 벼르고 있었다.


버스 요금을 계산하는 할머니 뒤를 따라 세자매가 버스 안으로 올라탄다. 버스는 한산한 편이었지만 둘 씩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이미 사람들이 한 명씩 앉아있어서 같이 앉을 수 없었다. 첫째는 할머니가 앉은 좌석 바로 뒤 큰 꽃다발을 안고 탄 여자 옆에 막내를 앉힌다. 둘째는 알아서 맨 뒤 자리로 가서 앉는다. 첫째는 막내가 앉은 바로 건너편 빈자리에 앉아서 막내에게 토할 거 같으면 말하라고 손짓을 한다.

옆 자리 여자의 달큰한 꽃다발 향기가 막내의 코를 간지럽힌다. 막내가 꽃다발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 맡는 시늉을 하자 여자가 환하게 웃는다.

"향기 좋니?"

"네. 엄마 냄새 같아요." 거짓말. 엄마에게선 언제나 땀에 절은 시큼하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엄마는 한 번도 꽃처럼 아름답지도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 적이 없었다고 첫째는 생각했다.

"엄마가 이 꽃처럼 아름다우신 모양이구나?"

"네! 저희 엄마는 정말 예쁘고 좋은 냄새가 나요. 지금은 악마의 거울 조각 때문에 우리를 잊어서 다른데 있지만요..."

"응? 엄마가 어디에 계시는데?"

"라플란드요. 지금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첫째를 바라본다. 첫째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양 손을 흔든다. 아이들의 놀이 중 하나려니 생각한 여자는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상력이 참 기발하구나 하고 웃는다.

"오늘 엄마를 만나면 팥빙수를 사달라고 할 거예요. 히히." 막내가 신나서 말한다.

"오! 좋겠구나. 그럼 이건 엄마를 만나면 드리려무나. 내 선물이란다." 여자는 꽃다발에서 분홍색 장미 두 송이와 보라색 수국 한 송이를 막내의 손에 쥐어준다. 첫째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거들었지만 여자는 막내의 손이 장미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얇은 포장지 하나를 떼서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준다. 여자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다. 비어있는 막내 옆으로 자리를 옮긴 첫째는 막내의 머리를 콩 쥐어박는다. 막내는 장미와 수국 다발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는다.

"이렇게 얼굴을 대고 있으니 멀미가 도망가는 것 같아"

그러나 작은 꽃다발도 막내의 멀미를 완전히 멈추게 하진 못했다. 바다처럼 넓은 강을 지나는 다리 위에서 막내는 검은 봉투에 토를 했고, 역한 냄새가 버스 안으로 퍼지자 사람들은 코를 틀어막고 창문을 열었다. 직접적으로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들에게 쏠려있는 시선과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표정에 주눅이  세자매는 얼른 버스에서 내리고 싶었다.  정거장은  가서 갈아타야 했지만 막내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세자매와 할머니는 중도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집애들은 이래서 안돼... 어딜 데리고 다닐 수가 없어."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하며 할머니가 투덜거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막내는 금세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린다.

"할머니 우리 배고파요. 뭐라도 먹어야 멀미가 덜 난다고 할머니가 그랬잖아요." 막내의 겨드랑이에 팔을 껴고 넘어지지 않도록 막내를 부축하면서 첫째가 말한다. 할머니가 매서운 눈으로 첫째를 향해 소리친다 "지금 이 꼴로 먹긴 멀 먹어? 먹으면 또 다 토할 텐데."

"아아 몰라. 몰라. 배고파. 배고프다고요. 나는 배고파서 더 이상 못 가." 둘째가 길 위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첫째는 둘째의 거침없고 확실한 자기표현이 때때로 힘들지만 이럴 땐 너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근처 분식집으로 세자매를 데리고 들어간다. 오늘 세자매가 먹은 첫 식사였다.




“기사양반, 면목동 가우?” 버스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를 따라 세자매도 버스에 올라탄다.

“가만있어보자 요금이… 얼마더라…” 버스 기사를 힐끔거리며 할머니가 허리춤에 찬 지갑 주머니를 주섬주섬 찾는다.

“거 초등학생 두 명이오?” 버스기사가 묻자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친다.

“아니 아니 무슨 큰일 날 소릴. 얘는 아직 미취학. 미취학이여.” 둘째를 버스 운전기사 앞으로 가까이 잡아끌며 할머니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나…2학…”이라고 항변하는 둘째의 입을 할머니가 손으로 틀어막으며 “초등학생 한 명”이라고 소리친다. 기사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둘째와 막내를 위아래로 훑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할머니는 초등학생 한 명에 해당하는 차비로 네 명이 버스를 타고 간다며 뿌듯해했지만 얼굴이 새빨개진 둘째는 할머니를 노려본다.

“나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절대 절대 할머니처럼 사기 치지 않을 거야.” 둘째가 씩씩거리며 말한다.

“욘석 봐라. 사기라니? 사기라니! 네가 키가 작아서 초등학생처럼 안 보이는 걸 왜 내 탓을 하누?”

“내 키가 작은 건 할머니가 밥을 제때제때 안 줬기 때문이거든?” 둘째는 말싸움으로 져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할머니에게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것도 둘째다.

“아이고 요 녀석아. 그런 말은 네 엄마를 만나면 하려무나. 내가 이렇게 아끼고 아껴서 아까 늬들 김밥도 사주고, 이렇게 버스도 태워줄 수 있다는 걸 왜 모르누?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 했는데…쯧쯧… 은혜도 모르는 것 같으니라고.” 할머니가 혀를 차며 말한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둘째가 뭐라 더 말을 하려는데 첫째가 둘째의 팔을 잡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둘째는 억울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잠시 노려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훽 돌린다. 막내는 첫째 무릎에 머리를 대고 미동 없이 누워있다. 둘째는 창밖을 구경하다 잠들고, 할머니도 꾸벅꾸벅 조는 사이 어느덧 버스는 면목동에 다다른다.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외삼촌 집은 아늑한 궁전 같았다. 담을 따라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작고 아담한 정원과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이층 자리 단독주택은 동화책에서나 보던 그림 같은 집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니 눈의 여왕의 궁전에 들어선 것처럼 서늘하고 시원한 기운에 세자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언니... 우리 라플란드에 온 거야?... 너무 시원해..." 막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한다. 둘째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기계 앞으로 가서 기계를 찬찬히 훑어본다.

"이게 에어컨이라는 건가? 책에서 읽었는데... 이렇게 생겼구나" 새롭고 신기한 것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둘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거실을 구경하는 동생들과 달리 첫째는 할머니와 함께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엉덩이를 반만 걸친 채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가져다준 오렌지주스를 홀짝이는 할머니의 표정은 여유롭다.

외삼촌은 삼십 분이 훨씬 지나서야 나타났다. 거실에 앉아있는 세자매를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사돈 오랜만이네, 악수를 건네는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외삼촌은 세자매를 힐끔거린다. 파리한 혈색에 비쩍 마른 세자매의 몰골이 에티오피아 난민 같다고 생각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애 엄마 어디 있소? 이 아이들 엄마 없이 키울 건가?" 외삼촌은 겨울처럼 서늘한 거실인데도 계속해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는다.

"잘 아시겠지만... 저도 동생이랑 연락이 안돼요. 그렇다고 이렇게 찾아오시면 어떡합니까..." 난처한 표정으로 외삼촌이 말한다. 둘째와 셋째는 어항 속 물고기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고개를 숙인 채 주스를 홀짝이던 첫째에게 외삼촌이 지갑에서 만원 자릴 꺼내 쥐어주면서 슈퍼에 가서 먹고 싶은 걸 사 오라고 한다. 둘째와 막내는 신나서 첫째를 뒤따른다.

"언니 여기 진짜 좋다. 우리 여기서 엄마랑 같이 살면 안 돼?" 막내가 신나서 첫째에게 말하지만 첫째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표정이 어두운 첫째를 곁눈질로 살피던 둘째가 셋째의 손을 잡고 앞서 걷는다. 첫째는 뒤돌아서 정원이 있는 마당에 빨간 벽돌 이층 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당을 이러저리 뛰어 다니는 세 자매를 웃으며 바라보는 엄마가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상상하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서 돌아오는 길에 대문 밖으로 걸어 나오는 할머니와 마주친다. 세자매는 할머니를 향해 뛰어간다. 첫째는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할머니와 외삼촌의 대화가 잘 되서 오늘은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첫째는 할머니의 입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소식 오면 언제든 연락 좀 꼭 주시구려. 이 불쌍한 애들을 봐서라도 부탁하네." 할머니가 외삼촌의 손을 잡고 간곡히 말한다. 외삼촌은 고개를 숙인 채 할머니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알겠노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세자매를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첫째에게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다섯 장을 쥐어준다.

"가는 길에 맛있는 거 사 먹고 동생들 잘 보살피고." 첫째는 돈을 받지는 않고 외삼촌의 손을 응시한다. 할머니가 그런 첫째를 옆으로 스윽 밀치고 들어와 외삼촌이 내민 돈을 낚아챈다.

"애가 쑥스러워서 받지를 못하는구먼... 내가 애들 돌 볼 때 쓰겠네..." 외삼촌은 첫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생들 잘 돌보라고 말하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첫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막내는 큰언니가 울자 따라 운다. 둘째는 입술을 꾹 다문채 화난 표정으로 대문을 노려본다. 할머니는 크게 한 숨을 쉰다.

"울긴 멋하러들 울어. 엄마 소식 오면 외삼촌이 연락 준다니까 기다리면서 니들끼리 똘똘 뭉쳐야 하는겨. 알아들어? 갈 길 멀다. 이 돈으로 삼겹살이나 사 가지고 집에 가서 구워 먹자." 할머니가 세자매의 등을 앞으로 떠밀며 걸음을 재촉한다. 막내는 슬며시 첫째 곁으로 와 손을 잡는다.

"언니, 겨울이 되면 엄마가 올 거야. 지금은 여름이라서 썰매를 못 타니깐 못 오는 걸 거야" 첫째는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응... 그래. 겨울에는 암마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둘째도 슬그머니 와서 첫째의 팔짱을 낀다. 여름 노을로 물든 골목에 세자매와 할머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 달그닥 달그닥 설거지하는 소리, 아무개를 나무라는 소리,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담을 넘어 골목으로 모여든다. 세자매는 각자 지극히 평범한 누군가의 저녁 일상을 상상하며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흥얼거린다.


“들장미가 자라는 언덕 아래

 우리 아기 예수 함께 하시네”


*이미지 저작권은 <책봄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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