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된 인간에 대하여. 메리셸리(Mary Shelley) <프랑켄슈타인>
3주 전 코로나에 확진되고 일주일간 자가 격리 치료의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 간 음식을 사다 나른 동생 외에는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집에서 그날의 업무를 보고, 가족 혹은 친구들과 랜선으로 건강 상태를 공유했다. 직접 만나지만 않았을 뿐이지 매일 가족들과 통화하고, 일 때문에 비대면으로 미팅도 참석하고 안부를 묻는 친구들과 앱으로 실시간 대화도 나눴다. 자가격리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확진 소식 덕에 멀리 사는 친구들과도 오랜만에 연락이 닿는 등의 반가운 일들도 있었지만 고립되어있는 상황이 덜 외롭거나 덜 쓸쓸하지는 않았다. 온라인으로 전하는 안녕과 위로는 '종료'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사라지는 상대의 목소리처럼 쉽게 흩어진다. 통화가 끝난 뒤 엄습하는 적막함은 그저 내가 여전히 혼자서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 감정과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 그 속에서 대화하는 인물들은 나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르더군. 나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어느 정도는 그들을 이해했지만 내 자아는 온전히 형성되지 않았어. 내게는 의지할 사람도 혈육도 없었지. '나의 출발지는 빈칸'이었고 내가 사라져도 슬퍼할 이가 없더군. 나의 외모는 흉측하고 몸집도 거대했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누구일까? 무엇일까? 어디서 왔으며 결국 어디로 가게 될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p.177)
언젠가는 이 병상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 원래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내내 나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느낀 저 감정과 비슷한 분노와 절망을 느꼈다. 병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나의 상황과 외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고립됨을 선택한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처한 상황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버려진 후 숲 속에서 우연히 숨어들게 된 장님 드라센 가족의 헛간에서 그 가족을 훔쳐보며 인간의 삶을 알아가고,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듯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며 인간이 고립되면 얼마나 빨리 절망하고 비관적인 생각으로 빠지게 되는지를 나를 통해 알아간다. 병상에 있는 동안 내가 가진 수많은 비관적인 생각들 중에 가장 많이 나를 괴롭힌 것은 '지금까지의 살아온 모든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과 '결국 혼자'라는 생각이었다.
강에서 피어오른 거대한 물안개가 반대편 산들을 휘감았더군요. 구름이 산봉우리들을 가렸고 컴컴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자 주위를 에워싼 모든 것이 더욱 우울하게 보였습니다. 아! 어째서 인간은 짐승보다 우월한 감성을 지녔을까요? 그래 봐야 더욱 얽매이기만 할 뿐인데. 그저 배고픔과 갈증, 욕정만 느낀다면 더 자유로울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마음은 이는 바람에도, 우연히 마주한 말이나 말로 전달되는 풍경에도 속절없이 흔들리지요. (p.133)
'결국 혼자서 이렇게 죽겠구나'라는 생각은 내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내가 8년째 살고 있는 이 집,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 얼마 전에 산 운동화, 앱으로 주문한 건강보조제들, 매일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는 동생의 정성, 매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지인들의 위로까지 모두 무의미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캄캄한 우울에 빠지게 되면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좋아하는 장소에 가서 기분 전환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격리된 인간은 우울 속으로 고립될 뿐이었다.
그저 단순한 욕구만 느끼는 삶이라면 지금보다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음 생에는 백치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던 전혜린의 말을 내 삶의 목표처럼 읊고 다닐 때가 있었다. 오만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어떤 시절에는 삶의 의미보다는 무의미를 쫓는 것이 더 멋져 보였던 것도 같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무의미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미지의 가능성으로 가득한 무한한 미래가 그냥 놓여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미함을 쫓던 삶은 무의미함을 견디는 삶으로 서서히 변한다. 사소한 무의미함에도 속절없이 흔들리거나 작은 균열에도 무너지게 되는 시기에 들어서게 되면 더 이상 내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작고 사소한 어떤 의미라도 있어야 삶은 지속될 수 있다. 무의미함을 견딘다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란 없다는 사실과 마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살아 숨 쉬는 것은 모두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인간이 살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 가운데 사람의 감정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있을까요? 나는 생명이 없는 육신에 생을 불어넣겠다는 한 가지 목표에 2년 가까이 매달렸습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건강을 돌보지 않았지요. 그렇게 지나치리만치 갈망하던 일이었는데, 막상 완성하고 나니 내가 꿈꾸었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감에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내 피조물의 몰골을 더는 볼 수 없어서 얼른 그 방을 뛰쳐나와 한 동안 침실을 서성거렸어요. 심란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지요. (P.72)
2년간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연구에 매진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완벽한 성공 앞에서 희열에 찬 기쁨을 느끼는 대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감"을 느끼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건 그의 피조물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다. 박사를 2년간 몰두하게 만들었던 "생명이 없는 육신에 생을 불어넣겠다는" 한 가지 목표(의미)가 실현되고 난 뒤에 찾아온 공허함과 맞닥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탄생'이 목적이었지 탄생 이후 살아 움직이는 피조물에 대한 계획은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든 만들고 탄생시킬 수 있다는 오만함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존재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자식을 통해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을 채우듯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의 작업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고자 했던 프랑켄슈타인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은 아니고, 괴물이라고 하기엔 인간처럼 보이는 그 피조물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복제가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 살아서 움직이는 걸 보는 순간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를 만든 동시에 내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그가 감히 행복한 삶을 꿈꾸더군. 나에게는 영원히 금지된 감정과 열정을 누리려 한다는 것을 알고 무기력한 질투와 쓰디쓴 분노가 일었고 복수를 향한 갈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협박한 일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마음먹었어. 얼마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지 알면서도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노예처럼 이끌렸지. 혐오스러운 충동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었을 때! 아니, 나는 불행하지 않았어. 이미 나를 지독한 절망에 빠뜨릴 고통을 억누르고 모든 감정을 내던졌으니까. 그때부터 악이 내 선이 됐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내가 기꺼이 택한 원칙에 내 성향을 맞추는 수밖에 없었지. 내 사악한 계획을 완성하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어. 이제 다 끝났군. 나의 마지막 희생자가 여기 누워있다! (p.313)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좀 더 겸허해진다. 무한한 시간이 자기 앞에 놓여있는 것 같지만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이 결국엔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무한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때때로 무의미함을 견뎌야 하는 순간과 마주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혼자서 살 수 없다는 사실도 명확해진다.
고립과 은둔의 삶으로 내몰린 그의 피조물이 절망하고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 건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철저한 외면과 방치 때문이다. 처음에 피조물은 인간을 사랑했다. 드라센 가족을 훔쳐보며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배우고, 책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바랐다. 자신이 속할 가족의 울타리를 애타게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신과 같은 존재를 더 만들어 달라는 그의 청탁을 프랑켄슈타인은 무책임하게 외면했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책하고 스스로를 연민하는 것에 시간을 쏟는 동안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그의 피조물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해하도록 만들었다.
1818년도 출판된 메리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무려 이백 년의 시간 차가 무색하리만큼 지금 시국에 적합한 메시지를 날린다.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외부 소통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계속 외면받고 방치된다면 결국 우리에게 괴물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 말이다.
코로나 때문에 정해진 7일간의 격리기간이 시간이 지나면 끝나리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 느꼈던 고립감은 몸이 아픈 것보다 더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 되고 있던 그 격리의 시간 동안 나와 계속 같이 있어준 고양이들이 없었다면, 책이 없었다면, 음식을 공수해준 동생들과 멀리서 위로해준 친구들, 지인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텼을까.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나는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
코로나 대유행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을 꺼리게 만들고 개인을 더욱 고립시키게 만드는 사회현상을 낳았지만 그 덕에 반대로 명확해지는 사실도 있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야 하고 온기를 나누고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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