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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조던 Oct 03. 2018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어요 '고흥'

'전남 고흥'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딱 두 가지였다. 멀다, 따뜻하다.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이 곳은 제주를 제외하고 한반도에서 가장 따뜻한 땅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임에도 커피가 생산되며, 실제 위치로도 땅끝마을 해남보다 더 아래라고 한다. 서울에서 쉼 없이 달리면 4~5시간, 여수, 순천에 놀러 왔는데 들려볼까 해도 1시간은 잡고 가야 한다. 옛날 옛적에도 이곳을 유배지로 삼았고, 한센병 환자를 격리하던 소록도도 이곳이니 물리적 거리를 떠나, 마음의 거리 또한 얼마나 먼 곳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고흥에겐 미안하지만, 이곳에 가게 된 이유는 이미 다른 남도 여행지를 다녀온 덕이었다. 남도 여행 1번지 여수, 순천은 다녀왔고 보성이나 장흥, 강진까지 여행을 하고 나니 해남, 고흥 정도가 남았다. 멀고 외진 만큼 개발이 더디고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천혜의 자연환경이 남아있다는 말이 따라왔고 그런 고흥이 궁금했다. 다녀온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이 닿기 전 고흥을 본 것에 감사한다.

고흥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여느 남도 도시들과 다른 규모감이 느껴졌다. 고흥의 대표 볼거리는 나로호 우주센터라는데 이 거대한 미래적 느낌이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낯설고 이색적이었다. 도로 옆으로는 초록이들이 무성하고, 파랗게 드리운 푸른 바다와 물 빠진 갯벌이 교차되었다. 다리를 건너 외나로도로 들어가며 중간중간 등장하는 이국적인 작은 야자수가 이 땅의 온도를 짐작케 했다. 커다란 간판으로 만난 유자며, 석류며, 매생이, 장어까지 이 땅에서 난다는데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곳. 땅의 크기 대비 적은 사람들과, 적당히 활기차고 고즈넉한 시내, 까만 밤하늘에 무성하던 보석같은 별들이 고흥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흥땅에서 확실히 제 색을 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고흥 사람들' 내가 만난 고흥 사람들은 하는 일도, 나이도 모두 달랐지만 묘하게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공통된 첫 번째 인사는 "어떻게 고흥까지(이 먼 곳까지) 오셨어요" 그다음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고흥 참 좋죠" 그리고 이어진 대화는 모두 고흥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향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풍경 '가고파 그 집'

"우리 사모님 고향이 고흥인데 사모님이 너무 미인이라 제가 따라왔죠. 고흥 좋죠? 참 좋아요. 겨울에도 따뜻해서 영하로 떨어지지 않아요. 반팔을 입는 날도 있어요. 아 정말~이에요"

고흥은 몰랐어도 '가고파 그 집'은 알고 있었다. 직업상 라이프 기사를 읽을 일이 많은데 이 집은 뉴스 기사로도, 잡지에서도 봤던 집인걸 보니 제법 유명한듯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시점에 이 집이 생각나 목적지를 확실히 정하게 된 것도 있다. 생각해보니 정말 한 번은 가고팠던 집이었네! 실제로 가족들이 고향에 모여 살기 위해 만들어진 집이라 그런가 숙소보다 정말 사는 '집' 같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한눈에 들어오던 탁 트인 바다 풍경과 섬들이었다.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정말 이 집에 며칠은 꽁꽁 숨어 냉장고를 가득 채워두고 뒹굴거리며 귤이나 까먹고 싶다. 겨울엔 더 귀해질 햇빛을 듬뿍 받으며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에서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고 싶다. 정말 반팔을 입고 있을지도 몰라. 생각만 해도 따뜻해.

* 가고파 그 집 뉴스들: http://www.gagopahome.co.kr/news/



지금까지 먹은 아인슈페너 중에 단연코 넘버원 'MKR'

"저는 어렸을 땐 도시에 가고 싶었어요. 고흥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지금은 여기가 정말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가 호주 카페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때 먹었던 커피를 여기서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예상하지 못한 건물 가운에 자리잡은 mkr

고흥에 와서 이틀째, 하루에도 몇 잔씩 사 마시던 커피였는데 24시간 넘도록 커피를 마시지 못하니 그 맛이 절실했다. 그때 만난 한 잔의 커피가 내 인생의 아인슈페너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홍상수 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노래방 상가 건물 1층의 카페에서 말이지! 이태원도, 합정도, 망원도, 서촌도 아닌 고흥 녹동항 주차장 앞에서 이런 힙한 카페를 말이다. 우리는 홀린 듯 1잔씩 커피를 클리어하고 다시 1잔씩 추가 주문을 했다.  추가로 주문한 커피 맛을 잘 느끼기 위해 물을 먼저 마시라는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집은 고집이 있는 집이다. 사장님도, 가게도, 커피맛도, 원두도, 작은 명함, 로고 하나까지 기분 좋은 뚝심과 섬세함이 있다. 그 투지를 응원하며 커피맛을 음미했다.



내일을 꿈꾸며 마늘돈까스를 튀기는 남자 '이레식당'

"제가 설득을 잘하거든요! 여자친구와 여자친구 부모님까지 설득해서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물론 걱정도 있죠. 하지만 여기가 변하는 게 하루하루가 달라요. 오시는 분들이 옛날 제주도 모습 같다고도 하시고요"


마늘이 유명하다는 고흥, 그 마늘로 돈까스를 만든다고 분주한 남자. 인기메뉴 마늘돈까스와 나란히 해장국이 있어 물어보니, 동네 주민들을 위해 메뉴에 해장국을 넣었다고한다. 술까지 팔면 더 자주 올거란 어르신들의 요청에도 절대 술은 팔지 않는다는 분. 직접 개발한 마늘 소스는 마늘을 으깨서 묽게 부어나오는데 그 맛이 전혀 맵거나 쓰지 않고 적당히 달콤하며 마늘의 좋은 향이 느껴졌다. 아마도 완성까지 사장님의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을거라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 일하다 어린시절을 보냈던 고향으로 내려온 사람. 젊은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냐는 어르신들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냐며  젊은 사람 없다고 볼맨소리 마시고 이왕 온 거 한 번 잘 해보라고 응원해달라고 외치셨다는 사장님. 꿈과 열정이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이토록 좋은 에너지를 주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의 문 앞에서 그와 함께 고흥의 발전과, 그의 성공을 기원하게 된다. 혹 다시 고흥을 찾게 된다면 그때까지 당신이 사랑하는 그 땅에서 부디 건재하시길!



당면 든 만두와 미나리 든 떡볶이 '명당 만두'

"(맛있어요~) 맛있으니깐 30년 넘게 여기서 장사를 했지"

열었을까 안 열었을까 기대반 걱정반으로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연세가 제법 있어 보이시는데... 주황색 나이키 티셔츠에 캡 모자를 눌러쓴 아저씨 한분이 웃으시네. 영업하시냐고 물어보니 날이 더워서 만두를 냉장고에 넣어놔 안 보이는 거라며 들어오라 하신다. 분식집보단 식당 같은 느낌의 오래된 가게. 당면이 든 튀김만두와 미나리가 든 국물 떡볶이가 나오자 정신없이 먹는다고 말이 없었다. 이 두 메뉴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MKR 커피집 사장님 말이 생각난다. "어렸을 때 분식집이 거기밖에 없어서 전 떡볶이에 미나리 든 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그 떡볶이를 먹고 자란 청년이 오픈한 카페와도 멀지 않은 이 곳. 그 꼬마도 우리도 어찌 그 맛을 잊으리오.



고흥 길목 단 하나의 메뉴를 꼽으라면 관산식당

"(맛있어요~) 맛있으면 돌아갈 때 한번 더 오세요"

고흥 초입에서 만난 이 집 칡냉면을 먹는 순간 여행이 맛있게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런 게 있지 않은가... 목적지를 찾아가 식당에서 첫 술을 뜨는데 그 맛이 좋으면 뭔가 여행운이 좋을 것 같은 느낌. 메뉴는 딱 하나 냉면뿐이다. 그 흔한 짝꿍 만두도 없다. 맵지도 짜지도 않은 적당한 양념에 육수는 따로 없다. 둥그렇게 올라간 살얼음이 녹으며 육수가 된다. 쫄깃한 면발을 후루룩 후루룩 당기며 한 그릇을 비우는 식사. 더워도 추워도 그 맛이 좋을듯한데 돌아오는 길 결국 다시 가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서울로 돌아와서 더운 여름 내내 어찌나 생각이 나던지.



해지는 녹동항에서 듣는 광화문 연가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아직 남아 있어요"

고흥의 시간 중 단 한순간만을 간직할 수 있다면, 난 노을 지던 이 저녁을 고이 접어 가지고 싶다. 녹동항에 내려 노을빛에 홀린 듯 다리를 건너 마주한 풍경. 그 빛과 어둠 사이로 머리가 희끗한 고흥 어르신 합창단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우리 아빠 얼굴이 생각나는 어르신들의 중저음으로 듣는 '광화문 연가' 세월이 묻어난 목소리 같기도 하고 사랑과 그리움의 시간을 지나온 담담한 음색 같기도 했다. 하늘은 감히 글로 설명할 수도 그릴 수도 없는 색들로 물들었다. 섬들은 서로의 어깨와 어깨를 기대고 날이 선 우리의 마음도 풀어진다. 몸과 마음이 어르신들의 노래로 가득 차던 이 순간은 고흥에서 맞이한 화해의 순간이자 최고의 장면이다.



김목인의 그게 다 외로워서래를 들으며 '거금도'

"그가 집에 간다 하고 또 다른 데 간 것도, 이 시간까지 남아 귀를 기울이는 것도 그게 다 외로워서래"

작고 많은 섬들을 곁에 둔 반도 고흥. 고흥군 금산면에 속하는 거금도는 소록도 바로 아래 위치한 섬이다. 집에 오기 아쉬운 발걸음에 소록도까지 갔다 조금 더 차를 몰고 달리면 바로 거금도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둥글게 한 바퀴 거금도를 돌고 나니 뭔가 고흥을 떠나는 게 덜 아쉽다. 끝 중에 끝까지 내려갔다 돌아오는 느낌. 파도가 출렁이는 땅 끝, 마을과 인적의 끝을 보고 온 느낌이 든다. 그제야 서울로 돌아선 엉덩이가 덜 아쉽다. 드라이브를 하게 된다면 김목인의 "그게 다 외로워서래"를 추천한다. 이 섬을 돌며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섬이 하는 말 같기도 하다. 외로움은 섬의 숙명이 아닐까. 사람도 똑같고.


작은 한반도에서 멀어봤자 얼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울에서 살다 보면 4시간 이상 운전해서 여행을 갈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고흥에서의 보고 스친 것들의 기억은 더 귀하게 남는다. 만났던 사람들과의 소소한 대화도 애틋하다. 내가 찾아갔을 때 "어서 오세요" 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라고 먼저 묻던 분들. 내게는 그 말이 어서 오세요라는 흔한 인사보다 더 반갑고 기다렸다는 말로 들렸다. 그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흥 그곳에 가고 싶다. 다시 고흥에 닿으면 실은 누구보다 만남을 기대했을 그들에게 나도 이 순간을 기다렸노라고 말하고 싶다. 그때면 내가 만났던 그들의 기대만큼이나 더 고흥스러워졌을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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