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우편함에 관심이 없어진지 오래다. 뚜껑을 연다해도 카드 명세서나 관리비 고지서가 들어있을게 뻔하다. 생각해보면 오래전 우편함은 호기심 상자였다. 집으로 뛰어오르면서 항상 습관처럼 우편함 뚜껑을 들췄다. 무엇이라도 들어있으면 기다리던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한뭉큼 꺼내 든 우편물에서 엄마, 아빠, 동생의 이름을 스치며 내 이름을 찾기 바빴다.
고등학교 때는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우편함에 넣고 간 친구도 있었다. 우표 없는 편지도 오던 시절이었다. 여름방학 때는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있는데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엽서가 왔다. 일주일에 두통씩 꾸준하게 오는 게 아닌가. 마치 키다리 아저씨 같던 그 주인공은 우리 이모였다. 그땐 엽서를 기다리던 힘으로 무료하고 갑갑한 여름을 견디었다.
새해가 되면 빳빳하고 두꺼운 연하장이 도착하기도 했다. 좋아하던 사람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가 도착한 날은 그 편지를 가방 깊이 꽁꽁 숨겼다. 길에서 읽으면 그 글자들이 날아가 버릴까봐 집에 도착해 내 방 책상에서 한글자 한글자 귀하게 정독하던 기억도난다. 미국으로 떠난 친구가 제발 빨리 이 편지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거금 몇만 원을 들여 급행으로 보낸 편지도 기억난다. 그들의 편지를 차곡차곡 운동화 박스에 모으곤했다.
내가 '제인 오스틴'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녀의 책 앞장마다 편지를 써 준 사람도 있었다. 가끔은 수련회나 연수에서 내가 미래의 나에게 쓴 편지를 받는 날도 있었다. 훗날 누군가가 내게 받은 편지 내용을 이야기해주면 "내가 그랬다고?" 하면서 편지 속의 내 모습과 생각에 부끄럽고 놀라기도 했다. 편지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고 사랑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감정을 쓰고 나누며 성장했구나 싶다.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오래전부터 편지를 좋아했다. 편지를 받으면 행복해했고 쓰는 것 또한 좋아했다. 편지를 쓰기 위해 교보문고나 MAKI에 가서 편지지나 봉투를 고르는 일 또한 즐거웠다. 사각사각 연필로 쓰고, 쓱쓱 펜으로 쓰고, 촉촉하게 묻어나는 만년필로 썼다. 다 쓴 편지를 봉투에 넣고 풀칠을 하고, 아껴둔 스티커를 붙이고 쪽~ 하고 뽀뽀하며 우체통에 넣기도 했다. 손으로 마음을 쓰고 보낸다는 행위 자체가 낭만적이었다. 받는 것은 또 어떠한가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도 꽉 찬 느낌이지만, 봉투를 열 때의 묘한 설렘만 한 것도 없으리라.
요즘에도 편지나 카드를 쓰려고 노력하지만 예전만큼 쉽지 않다. 카톡카톡으로 실시간 안부를 묻고, 1~2분 조차 길게 느껴지는 답을 받는다. 글이 귀찮을 땐 이모티콘 하나 딱 찍으면 그만인 시대. 난 그런 시대에서 늘 가방에 만년필을 넣고 다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일을 맞이하면 그 사람에게 카드를 쓰려고 애써본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엔 비행기에 앉아 보고싶은 사람에게 여행지에서 산 엽서를 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가족들에게 카드를 쓰고, 만나거나 헤어질 때 한 문장이라도 주고 싶은 사람들에겐 쪽지라도 써서 몰래 책상에 붙이곤한다.
어떤 날 책을 보는데 '편지'와 관련된 문장이 나를 찾아와 마음을 울렸다. 잊지 않으려고 바로 만년필을 꺼내 줄을 그었다. 집에 돌아와 말끔하게 씻고 잡지를 열었다. 그날 책에서 만난 똑같은 문장이 나왔다. 이 문장은 나를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편지를 좋아하는 나를 찾아온 편지이며, 내 편지 사랑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다. 그래, 편지를 쓸 일도 받을 일도 없다면 지금 곁에 사랑도 없겠지! 가능하다면 오래오래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대신 나 역시 가능한 오래오래 편지를 쓸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므로.
p.s 편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