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간의 내가 낯설어질 미래의 나를 위한 '기록'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던 어느 날 중앙대학교 학생들 인터뷰를 간 적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남학생, 그 학생이 해 준 말만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 남학생의 아버지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울고 있는 자기에게 그러셨단다.
"추억은 돌보지 않아도 남는다"
추억은 돌보지 않아도 남는다는 말, 당시에 듣고 그 순간 바로 아! 했던건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또 오래전 만났지만 아직까지 기억하고 종종 되새겨보는 문장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멀리서 보면 대개는 아름다운 법이거든'
"스무 살 때 뭘 했어요?"
"여자에게 빠져 있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헤어졌어."
"행복했나요?"
"멀리서 보면 대개는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거든"
-1973년의 핀볼-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애써 돌보지 않아도 저절로 나의 흔적들로 남겨지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개는 아름답게 기억되는 그것이 '추억'이라...그렇다면 그 추억은 누가 기억해줄까? 과연 나는 어떻게 내 추억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날의 기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미묘한 감정들, 일렁이고 때론 차고 넘치던 내 마음. 잊고 싶지 않아서 꼭 남겨두고 싶었던 말들, 풍경들, 소리들, 보고 싶던 얼굴, 체온, 그 모든 것들. 지금 이 시간의 내가 낯설어질 미래의 나를 위해 '기록' 이란 걸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 풉 웃음도 나고, 그때의 내가 꼭 다른 사람처럼 새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무엇보다 재밌고 귀엽지 않던가.
가능한 내가 좋아했던 것들 위주로 쓰자
사랑했던 여행지들의 사진과 글은 그 시간에 감사하며 한 줄이라도 정성스럽게 남기자. 이렇게 아름다운 서울 곳곳의 지금을 남겨보자, 영원히 똑같은 순간은 없으며 내가 본 지금은 그때뿐이다. 지금 좋아하고 있는 것들도 되도록 성실하게 꾸준하게 남겨보자. 훗날 나에게 왜 좋아했는지 알려주자. 가끔은 후회했던 것들도, 또 아주 가끔은 벗어나지 못해서 괴로웠던 것들도 기록해보자.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는 참 별 것도 아닌 것에 골골했구나 하면서 되려 위로받을지 몰라. 쓰다 보면, 차곡차곡 쌓이겠지 비록 추억은 돌보지 않아도 남는다고 하지만...
기록은 기억을 위한 힘이니깐!
*추억, 기억, 기록을 생각할 때 떠오른 사진
엄마가 아빠 대학 졸업식 선물로 그려준 그림 캔버스 뒷면의 기록, 선물을 받은 아빠 '숑'이 엄마 '봉'이 주었다고 남겨두었다. (숑 아래 o에 그려진 눈코입 귀여워 어쩔)
회사 점심시간, 카페에서 나오 던 노래가 좋아 팔을 뻗어 음악 검색하던 나를 본 점원이 쓱- 내밀던 메모 한 장 '노래 제목을 찾으시는 것 같아서' 점원의 센스와 따뜻함이 전해진다.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마을 ATLANTIS 서점의 천장
저 네모 박스 안에 이 서점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영국인 Oliver and Craig 두 사람이 산토리니에서 서점이 없는 것을 알게 된 그 후 시작된 기록들
크리스마스이브에 어두운 식탁에 세팅하던 메리 크리스마스 카드. 아침에 일어나면 볼 수 있길 기대하며 두근두근하게 잠든 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러 나가는데 아빠가 붙여두신 내 방 앞 '오늘의 날씨'
긴 여행 후 집에 돌아와 빈 냉장고를 열었을 때, 엄마의 포스트잇
8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스페인은 맛있다' 저자 김문정 언니가 적어 준 맛집 정보. 아직까지 친구들이 스페인으로 여행을 간다면, 난 이 종이를 편다.
커버로 사용한 베를린의 하늘. 여행 둘째 날 구 동독,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저녁을 먹으러 가다 하늘을 봤다 '하늘색과 분홍색이 같이 있는 하늘이네' 사진을 찍으며 생각했다. 잠시 후면 사라질 이 하늘, 꼭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