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엄마보다 아빠를 좋아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다면 난 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을 거다. 일단 엄마는 무서웠다. 엄마는 교사셨는데 정말 집에도 선생님이 있는 것 같았다. 예의범절은 기본,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공부는 항상 열심히, 밥은 깨끗하게 싹싹, 먹은 그릇은 설거지통에 야무지게! 생활 속에 늘 함께하시는 엄마와 잔소리도 떠날 날이 없었다. (엄마 미안 그래도 고마워 사랑해!! ㅋㅋ)
반면 아빠는 달랐다. 일단 아빠는 엄마만큼 많이 볼 수가 없었다. 새벽같이 나가시고 우리가 잠든 후에나 오시던 아빠. 당시 아빠는 일류기업이 된 S전자에 다니셨는데 늘 퇴근이 새벽, 빨라도 10시~11시셨다. 밤 9시에 퇴근하려면 엄청 눈치를 보던 시절이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잠깐씩 볼 수 있는 아빠는 아까운 시간 잔소리보다 폭풍 칭찬을 해주셨다. 난 아빠 앞에서 오늘 잘한 일을 자랑하기 바빴고, 학교에서 상장이라도 받은 날엔 아빠에게 보여드리고 칭찬받을 생각에 행복해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은 참 많다. 물론 생활반장 엄마가 상대적으로 더 엄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아빠는 가족들 특히 나에게 한결같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일단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끝까지 잘 들어주셨다. 여중, 여고, 여대생의 웃픈 고민도 그냥 넘기시는 법이 없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 엄마가 “노처녀 어서 시집가라”며 구박했을 때도 똑똑똑 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셔서 결혼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라, 평생 여기서 같이 살아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도 아빠다.(흑흑 이 말은 쓰면서도 찡하네..ㅠㅠ)
학창 시절 문학수업에서 '메밀꽃 필 무렵"을 배운 날이 있었다. ‘산 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막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 눈이 부시다'라는 문장을 보고 소금을 뿌린듯한 풍경이 궁금하다 했을 때 바로 봉평까지 차를 몰고 그 풍경을 보여 준 사람이 아빠다. 80년대 아들아들하던 시절이었지만 아빤 날 낳고 회사에 득녀주를 샀다고 하셨다. 내게 앞으로 딸로, 여자로 살아가기에 더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말해주시며 여성이 할 일이 더욱 많아질 거라 해주셨던 나의 아빠.
나에겐 너무 멋진 우상 같은 아빠였는데, 그런 아빠도 나이가 드셨고 모든 게 변해갔다. 대기업에 다니던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시자 그 든든한 타이틀도 주변에 북적이던 사람들도 점차 사라졌다. 모아둔 돈을 잃게 되는 사건도 있었고 그 사이 아빠는 점점 더 야위고, 머리도 희끗희끗 변해갔다. 뭐든 아빠에게 재잘거리기 바빴던 나는 아빠에게 설명하기 귀찮아하는 딸이 되어있었다. 어릴 땐 아빠가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아파트 복도의 발걸음 소리에도 쫑긋 반응했는데 이제 나와 아빠는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 결혼을 하니 더했다. 이젠 명절이나, 생일에 만나서 용돈이나 드리는 아빠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엄마랑 전화하며 아빠가 또 그랬다고! 하면서 같이 구박에 동참하기도;; 상황과 입장이 변했어 정말)
내가 딸을 낳으면서 우리 가족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엄마 아빠를 만나러 가는 횟수가 확확확+ 늘었다. 그리고 나의 딸은 할머니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할아버지를 정말 좋아한다.(꼭 나처럼) 아장아장 걸어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다. 아빠는 손녀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도 방안 다른 물건을 만져도 안돼라는 소리없이 함께 놀아주신다. 얼마 전엔 반짝반짝 작은별을 틀어주시고 같이 춤추는 모습도 보았다. 그 이후 딸에게 우리 집은 = 반짝반짝 할아버지네다.
오랜만에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도 우리 딸처럼 아빠를 참 좋아했는데, 그래 우리 아빠 저렇게 다정했는데, 저렇게 인자한 인상, 웃는 얼굴 앞에 나도 모든 걱정이나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빠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친한 친구가 집에 찾아와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너… 아빠 생각나?
가끔 돌아가신 아빠 생각나?”
친구의 대답을 듣고 꽝 머리를 맞은 듯 눈물이 핑~ 돌았다.
"매일 하는데?”
저 대답이 너무 마음에 남아서 이건 꼭 글로 남겨놔야지 생각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전기가 확 들어오듯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나도 아빠가 무지 보고 싶을 거란 걸. 언젠가 매일매일 생각날 거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