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얼었던 몸이 버거웠는지 '꾸엑' 신음소리를 내며 자동차 시동이 걸린다. 미동도 없이 엎어져 있는칠흑 같은 어둠. 그 틈을 타 후드득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에 놀란 별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급해진 마음에 나는 서두르는데
"새벽에 어디 가세요? 바깥사장님이랑 같이 안 가세요?"
아이코! 들켰다. 런닝셔츠 경비아저씨는 잠도 안 주무시나 보다ㅎㅎ
잠에 취한 도시는 새벽을 경계하고 여행자는 그 도시를 탈출하듯 빠져나온다. 숨 한번 깊이 들이마시고 "부웅' 이륙이라도 할 듯 속도를 부추긴 자동차는 고속도로 위에 포복자세로 몸을 밀착해 달린다. 이따금 엄습하는 낯선 정적에 놀라 뒷좌석을 돌아본다. 머리카락도 한번 쓸어본다. 라디오 볼륨도 최대한 높인다. 장거리운전을 좋아하는 나지만 양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길고 긴 어둠이 앞뒤로 덮치다 터널입구에서야 물러난다.
갑자기 주유 눈금이 오그라들며 마음이 불안해진다. '강원도 한파특보' 고속도로 공간 등걸에 내걸린 전광판 불빛은 반복적으로 각오하라는 암시를 보낸다.살짝 졸음이 몰려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깨물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니 엎드려 잠든 별이가 비몽사몽 바라보다 벌렁 눕는다.
가슴이 졸아드는 것 같은 조바심 끝에 내린천휴게소에 들러 자동차 배가 볼록하도록 주유를 한다. '우웅, 우웅' 음신하게 우는 바람 끝에 매달린 찬 공기는 금시 손끝을 저리게 하고 발목까지 아리게 한다. 뜨끈한 아랫목에 엎어져 넷플릭스 영화나 볼걸 괜히 나왔나 순간 걱정이 스쳤지만 뭐 얼어 죽기야 하겠나.
올 한 해 특이할만한 건(?) 별다른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지낸 거랄까. 그랬음에도 늘 분주하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연말만큼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겠다 생각했고. 일출을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떠나 온 것이다.
나는 바다 중 강원도 고성에 있는 아야진해변을 참 좋아한다. 카페 통유리 너머 짙푸른 바다빛을 맥없이 바라보다 보면 시공을 잊고 온전히 나만의 내면으로 접어든다. 세상의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는 평온하다 못해 몽롱한 의식에 빠져드는 상태를 내버려 둔 채, 몇 시간이고 바다를 바라보곤 한다. 커피가 한잔 두 잔 내 앞에 놓이고, 피낭시애와 샌드위치도 놓인다. 커피도 빵도 피낭시애도 나와 함께 바다에 취한다. 그러한 순간이 그리워 자꾸 떠나는 모양이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양양 국도변에 접어드니 하늘 가장자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아야진해변까지 남은 시간 15분, 일출을 놓치는 건 아닐까 속도를 낸다. 이러다 과속딱지 날아오겠다.
'끼익' 해변 주차장에 급하게 주차를 하고 해변으로 서둘러 내려간다. 붉어진 하늘 가장자리 끝을 날며 끼룩거리는 갈매기떼의 움직임이 분주하고,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흥분한 별이는 옴폭 파인 바다 웅덩이 물을 튕기며 뛰어 달린다.
용광로가 타오르듯 하늘 가운데가 붉어지며 닭이 계란을 낳는 모양으로 살짝 해가 삐진다. 일순간 고요가 휘몰아쳤고 하늘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풍덩 해를 쏟아낸다. 환호성, 파도소리, 셔터소리, 갈매기소리, 2022년 12월 31일의 새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는 산고의 고통을 물리치고 마알간 모습으로 자연의 속살을 투영해 낸다. 까무룩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새파란 바다색, 그위를 달리는 파도는 하얀 포말을 만든다. 삶은 이렇듯 찰나의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건 아닐까. 길고도 짧은, 아니 짧고도 긴 인생을 걸으며 잠시 얻은 위안과 행복이 힘이 되어 살아가는 것 같다.
과거에 머물렀던 사람도, 현재를 치열하게 사는 사람도, 미래를 꿈꾸는 사람도, 그에 걸맞은 위로와 때론 치유를 받으며 아무도 알 수 없는 종착역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바다 위에 윤슬이 반짝거리기 시작했고 , 나는 오픈런으로 통유리너머 아야진 바다가 가장 예쁘게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따끈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에 어질어질 취기가 오르고, 별이는 턱이 다 젖도록 멍푸치노를 흡입한다. 손가락만 한 피낭시애는 먹은 줄도 모르게 사라졌다.
한파특보가 무색하게 통유리너머 바다는 봄빛이다. 커피 한잔을 더 주문하고 그동안 밀쳐두었던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꼼꼼히 읽기 시작한다. 내 브런치 문도 열어본다.
지금 기분을 말하라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버려 두세요. 지금 이 기분이 깨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거든요.'
통유리 너머 바다색은 점점 짙어지고 오가는 사람들 표정도 해맑다.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오늘, 시간도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은 커피 한 모금을 털어마시고 소원을 꼭꼭 눌러쓴 종이배를 책갈피에 끼워 넣는다. 나는 다시 해변에 앉아 불어오는 해풍에 머리카락을 맡긴다. 얌전한 바다는 몸을 돌돌 말아 뒹굴어 내 앞에 포말을 쏟아 놓는다. 반짝거리는 윤슬에 눈이 감기고 심장은 몽롱한 그 무엇으로 울렁거린다. 떠나오길 잘했다. 2022년 12월 31일 아야진해변 일출의 좋은 기운을 지인들에게 보내고 운전대를 잡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독자분들과 작가님들 덕분에 힘이 되고 행복했습니다. 브런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