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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a Sep 30. 2015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터키의 넴룻 산 투어, 케냐의 보고리아, 나미비아의 피시리버 캐년.

시간이 없고 돈이 없다는 이유들로 여행할 때 내가 남겨놓아야 했던 곳들 중 가장 아쉬웠던 곳들이다. 다음에도 또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들을 남기기 바빴다. 아 여기도 보고 싶지만 여긴 다음에 와서 봐야지, 그래야 내가 다음에 또 오지 않겠어? 하며. 하지만 그건 굉장한 착각이었다. 여행은 마치 인생과 같아서 다시 되돌아 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현실로 다시 돌아와 보면 그 곳만을 보기 위해 다시 그 곳을 방문하기엔 무리이기도 하고, 어찌 저찌 하여 내가 다시 그 곳에 간다 하더라도 그 때의 내가 아니기에 결코 같을 수 없다. 그 때의 내가 그 곳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생각이나 감동, 그리고 그 날들의 풍경을 찾기 위해 아무리 먼 길을 돌아간다고 한들, 결코 같은 게 아닌 게 되어버린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중 만났던 그 남자 J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약해진 마음에 혼자 여행하기가 두려워진 나는 동행자를 애타게 찾았었다. 그리고 드디어 탄자니아 다레살렘의 YMCA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기로 한 한국인 남자 J. 일찍 도착한 나는 하루 종일 숙소에서 J를 기다렸다. 1층에 위치한 식당에 혼자 들어가 앉아 밥을 먹을까 하다가, J는 분명 먹지 않았을 테니 나는 그를 기다렸다가 함께 먹어야지 하는 의리로 배고픔을 버텼다.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여행 중인지, 혼자 왔는지 등의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날이 한참 어두워져서야 J는 내 눈앞에 나타났다. 너를 기다리느라 밥을 먹지 않았다는 내 말에 그는 나가서 뭐라도 좀 사먹자면서 나를 이끌고 앞장섰다. 그 밤에,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라고 꼽히는 다레살렘의 거리를, 그는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서 성큼성큼 걷는다. 나는 1년 간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주민이었고, 그는 몇 일을 여행한 여행자라서 그런 걸까. 아프리카의 검은 치안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조금 무서워서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웬만하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 도도한 표정을 입에 물고서 익숙하단 듯이 그 거리를 그렇게.  


동행자를 만나서 조금은 들뜬 나와 지저분한 단발머리가 말해주듯 참 거칠었던 J는 친구가 되어 잔지바르를 함께 여행했는데, 그와 나의 여행 스타일은 참 맞지 않았다. 내게 있어 숙소를 고르는 기준은 와이파이, 따뜻한 물, 청결 이었지만, 그에게 있어 숙소를 고르는 기준은 오로지 가격이었다. 또 나는 밥 한끼를 사 먹을 땐 그 나라가 아니면 먹지 못할 음식들을 먹고 싶어했지만, 그는 오로지 저렴한 감자튀김으로 한 끼, 한 끼를 해결했다. 잔지바르에 머물면서 내가 가장 열심히 했던 것은 스쿠버다이빙이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또 그저 바다가 좋아서 며칠을 나는 아침부터 노을까지 바다 속에서 숨쉬었고, 그는 그저 돌아다니며 싼 가격의 방을 알아보거나 혹은 숙소에서 숨을 고르는 듯 보였다. 물론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이 있는 법이지만, 그리고 또 나는 아프리카를, 그는 세계를 여행한다는 다른 목표를 갖고 있기에 그런 거겠지만, 반드시 지금의 내가 이 곳에서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있을 텐데도 돈을, 체력을 아끼는 그가 안타까웠다. 


미래는 내가 바라는 추상적인 어떤 것이고, 과거는 분명 내가 있었던 시간들인데 현재라는 시간은 참 이상하게도 실체가 없다. 곧 미래가 될 지금과 곧 과거가 될 지금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자기 자신을 관망한다. 

J는 ‘지금’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되지 않을 현재를 아끼고 또 아끼는 사람이었다. 이 돈으로 훗날 다른 곳에서 더 좋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간에는 다른 걸 하기 위해 휴식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을 아끼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지만 그 다가올 언젠가의 좋은 날에도 그에 걸맞은 힘듦이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다. 단지 과거가 될 지금보다 좋은 날일 뿐이고 좋은 곳일 뿐이지, 그 좋은 날에 좋은 곳에 있다 보면 더 좋은 날의 좋은 곳을 염원하게 될 테니까. 그 좋은 날에 바라보는 과거는 또 참 퍽퍽하다. 그 순간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미련 때문에 하나 정도의 후회로 남겨질 어제가 다섯 가지의 후회로 남겨질 어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J에게 나는 함께 다니는 짧은 몇 일 동안 너무 아끼지 말라며 자주 잔소리를 했었다. 그는 뼈 속까지 옹골찬 사람이었기에 잔소리라는 이름의 조언을 얼마나 깊게 들어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행과 인생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참 많이 닮았다. 나중에 나중은 없다. 결국 오늘 안에 그 모든 나중이 있을 뿐이다. 오늘의 나에 따라 나의 나중 또한 계속 변하고 바뀐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아낀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내가 남겨두었던 곳들, 내가 아꼈던 것들을 곱씹으며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앞으로 내가 인생이라는 곳을 여행 할 때는 꼭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살자고,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순간 순간들에 마치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에 차 내가 나를 속이며 헛된 희망이나 여지 같은 것들을 남겨두지는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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