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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날다 haninalda Sep 18. 2022

기억할 삶 -아비치의 The Nights

Avichii - The Nights


아홉살 때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으렴"


할아버지는 제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서 한과 서러움많은 청춘을 보내셔야만 하셨고,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을 겪으셔야만 하셨던.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한국인이어서, 전쟁으로 인해서 할 수 없는 통탄의 시대를 살으셔야만 하셨던 할아버지. 한탄이 담긴 짙은 한숨을 쉬실만도 하실테지만 그저 차분하게 말씀해주시던,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어렸던 제 마음에 더 애잔하게 그 말씀 하나하나가 제 마음에 담겼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생이라는 여정을 되돌아보시며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아셨던 할아버지의 말씀에 전하는 삶의 무게감이 제게 물밑듯이 다가왔습니다. 인생이란 흘러가면 그만인,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단 한 번 뿐이라는 사실과 함께요.  


효녀였던 엄마 덕분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자주 시간을 보냈던 어렸던 그 때 꾼 꿈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머리가 새하얗게 바랜 백발의 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초등학교, 타이어를 잘라 만든 울타리 안을 가득 채운 모래, 마른 타이어와 모래의 향, 그네의 녹슨 철 체인줄의 짙은 쇳내음이 맡아지는 그네에 힘없이 앉아 노인인 저는 초등학교 시절의 저를 추억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인 제가 꾼 꿈인데 꿈 속에서 너무도 절절하게 허망했습니다. 거대한 포탄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처럼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텅 빈 공허함, 가슴을 뚫고가는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허탈했습니다. 제 자신이 허무함으로 이루어진 듯이 말이죠. 꿈에서 깨었을 때 제가 잡고 있던 그네의 차가운 녹슨 철사 줄의 촉감과 함께 그 허망한 감정이 저를 감쌌습니다. 지금은 오직 지금에만 존재할 뿐, 결코 지금으로 두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조곤조곤한 말솜씨를 가지셨던, 중국어, 일본어와 함께 영어를 잘 하셔서 저로 하여금 다른 언어에 흥미를 가지게 해주셨던 할아버지.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으셨으나 할 수 없던 시대를, 그럼에도 시대를 탓하지는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열 한 살이 된 저는 블라우스를 선물받았습니다. 목선에 레이스가 달리고 목 중앙에는 레이스 리본이 나풀거리던, 부풀어오른 퍼프소매를 가진 긴팔의 분홍색 공단 블라우스였습니다. 막내의 막내 딸이라 항상 친척 언니들에게 옷을 물려받았던 저는 새 옷이 선사하는 그 향이 좋았습니다. 빛을 반사시켜 반짝거리는 사틴 소재의 핑크색 블라우스가 좋았습니다. 너무 좋아서  입지 않고 서랍 속 깊이 두었습니다. 가끔 꺼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그 블라우스를 입기 위해 꺼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 몸이 커졌다는 것을요. 그 블라우스는 이미 작아져서 제가 입을 수 없다는 것을요.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고 싶은 그 때에, 할 수 있는 때에 해야한다는 것을요.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일단 시작해보는 제가 된 것은요. 좋아하는 과자를 마지막까지 아끼지 않고 먹고 싶은 그 때에 맛있게 먹는 습관이 생긴 것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지금'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친구들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할 때도 초등학생이기에, 중학생이기에, 고등학생이기에 즐길 수 있는 순간을 만끽하고자 했습니다. 덕분에 종종 인생 2회차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친구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습니다. 친구는 의사로부터 "이 검사만 보면 앞으로 살 날이 2주뿐일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검사들을 더 받아보면서 다른 장기에서 발생한 염증이라는 다행스러운 결과를 받았습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날부터 다른 병원의 결과를 듣기 전까지 마음이 심란했을 법도 한데 친구는 말했습니다.


"살 날이 2주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구나했어. 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잘 살아왔다. 지금 이렇게 떠나도 여한이 없다 생각했어. 삶에 미련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했어. 여행다니고 하고 싶은 거 할만큼 하면서 그렇게 나를 위해 돈이란 자원을 다 썼으니까. 정말 내게 2주밖에 안 남았는데 통장 잔고에 돈이 많으면 뭐해. 해보고싶은 것도 못 해보고 죽게 되면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하고, 나를 위해 열심히 쓴 나를 칭찬하고 스스로 참 운이 좋다고 말했어."

 

그녀는 매우 덤덤하게 그러나 충만한 마음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멋진 커리어를 바탕으로 자기 사업을 하며 매 순간을 감사하며 활기차게 사는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삶을 찬양하며 힘차게 살아가야겠다 다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가 있습니다. 제이슨 르만(Jason Lehman)이 14살에 쓴 시로 알려진 '현재 시제(Present Tense)'입니다.


봄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여름이었다.

그 따뜻한 날들, 그리고 멋진 야외 활동들.

여름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가을이었다.

그 형형색색의 잎들, 그리고 선선하고 건조한 공기.

가을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겨울이었다.

그 아름다운 눈, 그리고 성탄절 축제시즌의 기쁨.

겨울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봄이었다.

그 자연의 따스함과 만개하는 꽃들.

나는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어른이었다,

그 자유와 존경.

나는 20살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30살이었다.

그 성숙함과 세련됨.

나는 중년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20대였다.

그 젊음과 자유로운 영혼.

나는 은퇴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것은 중년이었다,

그 한계없는 마음의 평정.

내 인생은 끝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했던 것을 절대 갖지 못했다.



It was spring, but it was summer I wanted,

The warm days, and the great outdoors.

It was summer, but it was fall I wanted,

The colorful leaves, and the cool, dry air.

It was fall, but it was winter I wanted,

The beautiful snow, and the joy of the holiday season.

It was winter, but it was spring I wanted,

The warmth and the blossoming of nature.

I was a child, but it was adulthood I wanted,

The freedom and respect.

I was 20, but it was 30 I wanted,

To be mature, and sophisticated.

I was middle-aged, but it was 20 I wanted,

The youth and the free spirit.

I was retired, but it was middle-age I wanted,

The presence of mind without limitations.

My life was over, and I never got what I wanted.


삶이 무력하게 느껴질 때 이 시를 떠올리며 내 삶의 마지막 날에 나는 내가 원했던 것을 가졌다고 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현재에 충실히 살자며 다시금 저를 다잡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시간에는 두 분이 좋아하시던 곶감과 홍시의 향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그 때나 지금이나 특유의 식감으로 인해 곶감과 홍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레스토랑이나 모임에서 곶감, 홍시를 만날 때 조부모와의 시간을 떠올립니다.


2주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고 있는 친구가 좋아하는 향수 중에는 펜할리곤스(Penhaligon's)의 잉글리시 펀(English Fern)이란 향수가 있습니다. 친구는 그게 자신에게는 시골, 자연의 향이라고 합니다. 1890년에 출시된 라벤더, 제라늄, 클로브, 오크모스, 패츌리, 샌달우드 노트가 뚜렷하기보다는 공기 중에 잔잔하게 묻어져 등장하는, 유명해서 누구나 흥얼거리는 노래보다는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잔잔한 명상음악과도 같은 향수입니다. 피카소보다는 모네의 그림같은 흩어지는, 아련한, 잔상의 향입니다.. 이 향수는 단종되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에 놀러갔을 때 친구가 가지고 있는 향수로 만났던 향입니다.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없는 이 향은 그녀를 떠오르면 함께 생각나는 향수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평소에 자주 입는 향수 중 하나는 아쿠아 디 파르마의 끼노또 디 리구리아(Chinotto di Liguria)입니다. 한국에서는 치노토 디 리구리아로 말하고 적고 있는데 이태리에서 공부를 했던 그녀는 이태리 발음 그대로 끼노토로 말합니다. 그녀의 차 문을 열고 앉았을 때 차 안에서 싱그럽게 웃고 있는 끼노또의 향은 늘 저를 기분좋게 만듭니다. 이태리 머틀잎 오렌지 나무 열매 과즙으로 만드는 탄산 청량 음료인 끼노또가 떠오른다는 그녀의 말은 이 향수를 만날 때마다 떠오릅니다. 이태리에서 패션을 공부하던 그 때의 그녀를 만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끼노또, 만다린 오렌지, 로즈메리, 재스민, 제라늄, 가다멈, 머스크의 노트들이 서로 기분좋게 수다를 떨고 있는,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잔잔하면서도 기분 좋은 따스함이 가득한 향수입니다. 혹여라도 그녀에게 남았던 삶이 정말 2주 뿐이었다면 그랬다면 저는 저 두 향수로 그녀를 떠올리며 기억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기에 더 많은 기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 감사합니다. 삶에 치이기도 하고, 삶에 고맙기도 하는 순간, 그런 날에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바로 아비치(Avicii)의 더 나이츠(The Nights)입니다. 언젠가 너는 이 세상을 뒤로 하고 떠날거야. 그러니 네가 기억할 삶을 살으라는 가사를 되네이면서 말이죠.

 

https://youtu.be/UtF6Jej8yb4



적으면서 잊지 않으려합니다.

지금 제가 사는 시대는 제 할아버지처럼 한국인이기에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러니 그가, 그 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할 수 없던 것을 상상하고 할 수 있음을요.


삶은 단 한 번 뿐이란 사실을요.

그러니 기억할 삶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려 합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세상 마지막 날의 나를 위해서요.



아비치 The Nights 가사


Once upon a younger year

옛날 어린 시절에

When all our shadows disappeared

우리 그림자가 모두 사라졌을 때 

The animals inside came out to play

내면의 괴물들이 내 안에서 나왔어

Went face to face with all our fears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어 

Learned our lessons through the tears

눈물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어

Made memories we knew would never fade

우리의 기억들은 결코 사라지지않는다는 것을

One day, my father, he told me, "Son, don't let it slip away"

어느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아들아, 기억들이 그저 흘러가게 두지 말거라.”

He took me in his arms, I heard him say

아버지는 두 팔에 나를 안아주었고 나는 들었어

"When you get older your wild heart will live for younger days

“네가 나이들수록 너는 너의 젊은 시절을 기억할 거야.

Think of me if ever you're afraid"

네가 두려움에 떨때면 나를 생각하렴.”

He said, "One day, you'll leave this world behind

그가 말했어.”언젠간 너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될거야.

So live a life you will remember"

그러니 네가 기억할만한 인생을 살도록 하렴.”

My father told me when I was just a child

내가 겨우 아이였을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These are the nights that never die"

“이 밤은 결코 기억에서 사라지지않을 거란다.” 

My father told me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When thunderclouds start pouring down

“먹구름이 비를 쏟아내리기 시작할때

Light a fire they can't put out

비에 꺼지지않을 불을 지피렴

Carve your name into those shining stars"

빛나는 별들에 네 이름을 새기렴

He said, "Go venture far beyond the shores

그는 말했어. “이 해변을 넘어 모험을 떠나렴

Don't forsake this life of yours

네게 주어진 삶을 저버리지 마렴

I'll guide you home no matter where you are"

어디에 있든지 내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거란다.”

One day, my father, he told me, "Son, don't let it slip away"

어느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아들아, 기억들이 그저 흘러가게 두지 말거라.”

When I was just a kid, I heard him say

아버지는 두 팔에 나를 안아주었고 나는 들었어

"When you get older your wild heart will live for younger days

“네가 나이들수록 너는 너의 젊은 시절을 기억할 거야.

Think of me if ever you're afraid"

네가 두려움에 떨때면 나를 생각하렴.”

He said, "One day, you'll leave this world behind

그가 말했어.”언젠간 너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될거야.

So live a life you will remember"

그러니 네가 기억할만한 인생을 살도록 하렴.”

My father told me when I was just a child

내가 겨우 아이였을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These are the nights that never die"

“이 밤은 결코 기억에서 사라지지않을 거란다.” 

My father told me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My father told me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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