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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Sep 21. 2015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고

인간관계의 질이 중요하다

번역사라고 하면 흔히들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럼 집에서만 일하고 사람들 만날 일은 없겠네요?”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로는 “정말 외롭겠어요.”, “매일 밤새면 어떻게 살아요?”, “생활하기 힘들지 않아요?” 등이 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번역사의 이미지를 그려보게 된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나를 ‘몇 날 며칠이고 골방에 처박혀 밤새 일만 하고 인간과의 교류는 전혀 없는 고독하고 가난한 번역사’로 여기는 것 같다. 


일반 회사원과 비교하면 번역사로서 사람들과의 접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같은 부서 동료들과 상사들을 매일 만나야 하며 전체 회의가 있는 날엔 타 부서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할 수 없다. 또한 교육이나 행사가 있을 때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한자리에 앉기도 한다. 규모가 작은 회사라 할지라도 최소 서너 명의 동료들은 매일 볼 테니 매일 출근할 필요가 없는 나 같은 번역사가 ‘접촉’하는 사람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비즈니스적인 인간관계에 국한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회사나 업무로 얽힌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비즈니스로 인한 ‘접촉’은 줄어들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번역사라는 직업이 내게는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번역사가 비즈니스적인 만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번역사도 많지는 않지만 분야에 따라 ‘접촉’이 필요할 때가 있다. 출판번역의 경우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화와 문자, 메일 ‘접속’만으로도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산업번역에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개인 작업이라면 메일과 전화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프로젝트 그룹으로 일할 때는 필요에 따라 한 곳에 모여 작업할 때가 종종 있다. 대외비이거나 잦은 회의가 필요한 업무는 업체에서 출퇴근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2년 전에 S기업의 무선 사업부 번역을 위해 구미센터로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업체 측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출퇴근하며 대외비 업무를 처리했었다. 게임 번역을 할 때는 새로운 게임 스킬을 배우거나 빌드 테스트를 위해 몇 주씩 회사로 가서 일을 한 적도 있다. 그 밖에도 Trados나 MemoQ 같은 번역 툴 교육을 위해, PM과의 친목을 위해, 계약을 위해 회사를 찾았다. 번역협동조합 활동도 반 정도는 비즈니스로 볼 수 있으니 그것도 포함한다. 


난 다행히 비즈니스적인 인간관계에 미련이 없다. 그러니 그들과의 ‘접촉’이 줄어든 게 전혀 아쉽지 않다. 재미없는 회식과 강요하는 술자리, 억지로 참여해야 하는 경조사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됐다. 대신 내가 원하는 모임을 만들거나 찾는데 열중한다. 독서모임이나 학습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돈이나 권력, 지위, 신분으로 얽히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부담이 없다. 나와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이니 대화거리가 풍성하고 스트레스도 적다. 죽이 잘 맞는 사람과 사심 없이 우정을 쌓을 수도 있다. 회사 다닐 때와 비교하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는 절반 가까이 줄었고 즐거움은 배로 늘었다. (그럼에도 인간관계는 내게 가장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긴 하다) 


그러니 번역사가 되어서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어난 게 사실이지만 인간관계의 질과 양을 따진다면 충분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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