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1Q84> 를 완독하고.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큐레이션(또는 연결하게) 된 콘텐츠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였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은 왜 조지 오웰을 불러냈을까. 오웰은 '멀지 않은 미래 언젠가'를 상징하기 위해 <1984>를 쓰기 시작한 해인 1948년의 숫자 두 개를 뒤집었다. 소설 속에서 빅 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이라는 기계(미디어)를 통해 사회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감시하고 통제한다. 오웰은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기술과 미디어가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될 거라 예언한 것이다. 바로 그 1984년이 도래하자 백남준은 새해가 시작되는 첫 날(1월 1일)에 전세계를 실시간 위성 중계로 연결하는 미디어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미디어라는 것이 사회통제의 수단일 수도 있지만 예술의 도구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조지 오웰, 당신은 절반만 맞았어." 백남준을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오웰에게 던진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그리고 <1Q84>. 하루키는 어떤 관점에서 1984년을 불러냈을까.
1Q84는 1984와 일본어 발음이 같다고 한다. 소설은 1984년이지만 뭔가 이상한, 'Q'uestion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1Q84년으로 이동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는 무난하게(?) 설정되는 소설의 프레임인 평행 세계 같은 것이 아니다. 동전의 양면 또는 거울의 뒷면과 같은 세계도 아니다. 그 증거가 바로 두 개의 달이다. 평행 세계이거나 이면의 세계였다면 달은 여전히 하나여야 하고 다만 바라보는 각도가 180도 달라져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그러나 1Q84년에는 두 개의 달이 뜬다. 큰 달과 큰 달을 따르는 작은 달. 초록색의 작은 달(도터)는 큰 달인 엄마(마더)가 낳은 달이다. 그래서 작은 달은 항상 큰 달을 따라 움직인다.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계에는 다른 존재가 있다. 리틀 피플. 백설공주의 일곱난장이를 연상시키는 이들은 공기 중에서 실을 뽑아내 번데기를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공기 번데기를 완성하는 데는 대략 3일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 번데기에서 도터가 탄생한다. 마더 없이는 탄생이 불가능한 도터는 인격체라기보다는 영매(靈媒) 혹은 무녀다. 영매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통신선(communication line)으로서 역할을 한다. 전화 교환원 같은. 그래서 영매는 퍼시버(perceiver)가 된다. 신이 말하고 싶어한다. 전화 교환원은 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걸 인지하고 그 말을 들어줄 사람에게 연결한다. 그럼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진다. 그럼 아무나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무나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신의 음성은 가치가 없어진다. 그것은 마치 안내 방송과 같은 수준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선사시대를 포함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신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희귀한 존재로 제한되어 왔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 순수한 이상세계를 건설하려고 했던 조직 '선구'의 리더가 어느 날 계획에도 없이 리시버가 된다. 왜. 그는 왜 리시버가 됐을까.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었길래. 리틀 피플의 존재를 인지한 최초의 인간은 후카에리다. 그리고 후카에리(도터)의 아버지(마더)는 선구의 리더였다. 리더로서 어떠했는지는 마더의 자격에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단순히 후카에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리시버가 되었다. 자 그럼 이제 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이런...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게 이렇게 난해할 줄이야. 신은 왜 말하고자 하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에 대한 설명은 소설 어디에도 없다. 다만 선구 교단의 추종자들은 그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자들에게 마약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안 되듯이. 신탁(神託)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일단 몸이 마비되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을 증명해주는 액션의 기능을 강제로 정지당하는 것이다. 그 다음 성적인(sexual) 기능을 할 수 없는 열 살 소녀들과 교접을 해야한다. 인간이 성 행위로부터 얻고자 하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액션이다. 그 과정을 통해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과정에서 소녀들의 생식기는 모두 파괴된다. 처음부터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요구받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녀의 생식기 파괴라는 인간의 관점에서 매우 극악무도한 사건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조두순을 보라. 인간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이는 극형에 처해져 마땅한 범죄임에 틀림없고 결국 이를 알게 된 인간세계는 처단이라는 회로를 작동시킨다. 그런데 이 회로는 고결한 인간 이성의 자연스러운 작동인 동시에 사전에 신이 설계해둔 회로라는 것이 드러난다. 인류 역사에서 영매로 기능한 이들은 대부분 성적 능력을 가진 성숙한 여인들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교접은 일반적으로 절정에서 환희를 경험한다. 마약을 해도 유사한 환희를 경험할 것이다. 이 환희는 다른 말로 '영감(靈感, inspiration)'이다. 아티스트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서 성적인 쾌락이나 마약에 빠지기도 한다. 세계가 극찬해 마지않는 피카소도 그랬다. 그런데 <1Q84>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너무도 괴롭다. 환희를 경험할 수 있는 자극은 손톱만큼도 없다. 퍼시버와 리시버는 오직 '기능(機能, function)'이다. 그렇다면 신의 목소리라도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신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신탁의 구체성은 없다. 다만 신의 목소리에 중독된 자들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실은 신의 목소리가 있었다.
엄밀하게 이 소설에는 두 개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여성을 학대하는 남성은 죽어야 한다'는 목소리다. 아오마메를 암살자로 만들고 노부인과 함께 결사대를 만들게 한 목소리. 그러나 이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닌 인간의 목소리다. 신의 목소리는 오직 하나. '우리는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다시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 소설에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없지만 아오마메는 '알고 있는' 신의 목소리. 상처 받은 어린 시절을 가졌던 두 아이. 덴고가 외톨이 아오마메를 감싸주었던 하나의 사건. 둘밖에 없는 교실에서 잠시 손을 잡는 행위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던 아오마메. 이 둘은 다시 만나야만 한다. 이십 년간 일체의 접점 없이 살았던 두 사람은 다시 만나야만 한다고 신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4년을 산다면 이들은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장치가 필요해진다. 그리고 이 장치가 바로 1Q84년이라는 '약간 다른' 세계다. 이 장치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신이 설계한 대로 운명의 방향을 바꿔놓는 역할. 레일 포인트를 바꿔놓은 것이다.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와 함께 열린 이 새로운 세계는 두 사람을 엮어낸다. 1Q84년의 세계에서 이들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루키의 놀라운 설정이 있다. 잘 생각해 보라. 소설 어디에도 언급이 없지만 이 1Q84년 자체가 공기 번데기인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자궁. 이 거대한 공기 번데기는 두 사람을 연결해 1984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새로운 운명을 만들기 위한 신의 설계였다. 다만 영매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작업 공방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수준에서 끝난다면 꿈, 환상 혹은 판타지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1Q84년은 설계되는 순간부터 반드시 빠져나와야 하는 세계였다. 엄마가 배 속에서 10개월 간 아이를 품고 있다가 반드시 세상에 내어놓아야 하듯이. 그래서 소설은 4월에 시작해서 12월에 끝난다. 8개월을 넘겼으니 이변이 없는 한 아이는 안전한 것이다. 그리고 복귀의 임무는 완성된다.
이 1Q84년은 우리에게도 존재하는가. 상처 받았으나 그것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치유해주는 사람도 없는 어린 아이에게 베풀어진 작은 친절함. 큰 도화지에 찍힌 작은 점 같은 그 경험이 인생의 냉혹함을 버티게 해준 구원의 빛이 된 경험. 그 존재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 그 소망으로 인해 잠들기 전이나 커피를 한 잔 마실 때 잠시 현실을 넘어 상상하게 되는 세계. 그 상상이 현실이 되면 좋겠다는 상상. 그 현현(顯現, incarnation)이 바로 <1Q84>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책의 말미에 아오마메의 기억을 통해 독자들에게 묻는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하루키는 <1984>를 끌어들였을까. 단순하게 1984와 1Q84는 발음이 같아서 재미난 설정을 하기에 좋다. <1984>는 1948년에 쓰기 시작해 1949년에 출간되었다. 하루키는 1949년에 태어났다. <1984> 에서 텔레스크린이 하는 역할을 <1Q84> 에서는 하늘에 떠있는 달이 담당한다. 권력이 만든 기계가 아닌 태고 적부터 존재했던 달이 온 세상을 감시하고 감청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따라간다면 두 개의 달을 만든 건 리틀 피플이 된다. 하루키는 에비스노 선생의 입을 빌려 말한다.
"자네도 알겠지만,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에서 빅 브라더라는 독재자를 등장시켰어. 물론 스탈린주의를 우화적으로 그린 것이지. 그리고 빅 브라더라는 용어는 그 이후 일종의 사회적 아이콘이 되었네. 그건 오웰의 공적이겠지. 그리고 바로 지금, 실제 1984년에 빅 브라더는 너무도 유명하고 너무도 빤히 보이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 만일 지금 우리 사회에 빅 브라더가 출현한다면 우리는 그 인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겠지. '조심해라. 저자는 빅 브라더다!' 하고. 다시 말해 실제 이 세계에는 더이상 빅 브라더가 나설 자리는 없네. 그 대신 이 리틀 피플이라는 것이 등장했어. 상당히 흥미로운 언어적 대비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 말을 하고 에비스노 선생은 덴고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며 웃음 비슷한 것을 떠올린다. 진지하게 등장하는 이 장면은 알고 보면 작가의 위트다. 그러나 독자는 그걸 모른다. 이것이 하루키의 천재성이라고 평가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또 있다. 원작자 하루에키와 대필 작가 덴고의 결합.
"그렇지요. 법률적인 의미에서는, 현세적인 의미에서는, 그야 물론 범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위대한 고전, 혹은 위대한 인용원으로서의 픽션에서 굳이 인용을 하자면, 그건 그야말로 '사고 범죄'에 가까운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올해는 1984년입니다. 이건 정말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리더의 입을 통해서도 하루키는 1984년과 1Q84년을 대비시킨다.
"그래, 1984년도, 1Q84년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구성요소를 갖고 있어. 자네가 그 세계를 믿지 않는다면, 또한 그곳에 사랑이 없다면, 모든 건 가짜에 지나지 않아. 어느 세계에 있건, 어떠한 세계에 있건, 가설과 사실을 가르는 선은 대개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아. 그 선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수밖에 없어."
1984년의 빅 브라더를 아오마메는 이해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 빅 브라더는 그의 어린 시절에 신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은 부모의 신이었을 뿐 그녀의 신은 아니다. 오직 빅 브라더였을 뿐.
자신이 입에 올린 그 기도문의 내용을 어린 시절의 아오마메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련의 말들은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 있었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기 전에도 반드시 기도를 해야 했다. 혼자서, 하지만 큰 소리로.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의 눈초리나 비웃음에 신경 쓸 것 없다. 중요한 건 신께서 너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눈에서 도망칠 수 없다. 빅 브라더는 너를 보고 있다.
하지만 1Q84년의 리틀 피플은 감시와 통제가 아닌 궁극의 운명을 되찾아주는 신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빅 브라더를 뛰어넘는다. 1Q84는 1984에서 출발했으나 1984를 뛰어넘었다. 청출어람(靑出於藍). 하루키는 조지 오웰의 제자 격이었으나 이렇게 스승을 뛰어넘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 한 편을 지어내기 위해 문학과 음악, 그리고 세계의 인식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아올렸는지를 보면서 감탄하게 된다. 프로정신 그 자체. 하루키는 공중에 떠도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지식과 통찰 중에서 실 한 올을 뽑아내 공기 번데기를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