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를 써보는 게 꿈이었다. 대개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문학 작품의 번역서에는 책의 끄트머리 혹은 앞머리에 역자 후기가 실리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에서는 아마도 가장 충실한 독자였을 번역가의 글을 읽을 때면, 내 눈앞에는 자연스레 어둑한 방 안에서 하얀 모니터를 마주한 채 앉아있는 굽은 등이 떠오르곤 했다. 노트북 옆 낡은 독서대에는 타국의 언어가 인쇄된 책이 펼쳐져 있고 책상 여기저기에는 A4용지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그 하얀 종이에 박힌 까만 글자 위를 자유로이 활보하며 흔적을 남긴 용감한 빨간 펜은 책상 귀퉁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다. 바닥에 떨어지든 말든 굽은 등에게는 관심 밖이다. 그 공간 안에서 가장 활동적인 건 손가락뿐이다. 키보드 위의 분주한 손가락 춤은 그칠 줄 모른다. 그러다 창밖이 희붐해질 무렵이면 고된 춤은 멈추고, 그제야 굽은 등이 서서히 펴진다. 머그컵은 바닥을 보인 지 오래다. 굽은 등이 다시 커피를 끓이러 가면 모니터 속 화면에는 어느덧 한 편의 역자 후기가 완성되어 있다.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까지 역자 후기는 내게 로망이나 마찬가지였다. 옮긴이로서 책에 내 이름 석 자가 올라가는 것도 두근거리는 일이었지만, 책의 페이지를 할애하여 내가 쓴 글이 실리는 건 다른 차원의 설렘이었다. 언젠가 쓰게 될 나의 첫 역자 후기를 상상하면서 번역서마다 실린 역자들의 다양한 글을 찾아 읽는 버릇이 생겼다. 내용이 기대에 못 미쳐도 역자 후기가 멋지면 그 책은 내게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었다. 번역서의 경우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에는 역자 후기도 고려 대상이 되었다. 번역가 중에는 글을 잘 쓰는 이가 꽤 많았다. 나도 그런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
여러 차례 번역 샘플에 도전할 기회가 왔고 나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첫 샘플은 홍콩 여행 가이드 책이었다. 보기 좋게 샘플에 떨어졌지만 나는 그리 낙담하지는 않았다. 여행 가이드에 역자 후기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두 번째, 세 번째 줄줄이 샘플이 떨어졌을 때도 ‘내 첫 역자 후기를 이런 책으로 쓰고 싶진 않아’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도 생겼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반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나는 첫 역서를 맡게 되었다. 역자 후기고 뭐고 이젠 어떤 책이든 일단 맡았으면 좋겠다며 체념이 거의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오래 버틴 보람이 있었는지 첫 책은 너무도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내용이었다. 책과 책방에 관한 에세이. 마침 단골로 드나들던 책방도 있었다. 나는 번역을 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책방 관련 용어를 만날 때면 단골 책방 사장님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일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몰두했다.
마감 시한으로 주어진 두 달 반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모니터 앞에서 일본어 문장과 씨름하다가 굽은 등을 잠시 펼 때면 역자 후기를 어떤 식으로 쓸지 생각했다. 사실 출판사 측에서 역자 후기를 써달라는 요청은 없었는데. 하긴, 난 이제 막 번역의 세계에 발을 들인 초짜였으니까. 출판사 입장에서는 번역이나 제대로 해서 넘겨주면 감지덕지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내 멋대로 역자 후기를 써서 건넨다는 게 좀 우습기도 하고 가당치 않은 일처럼 여겨졌다. 마감 당일이 되자 나는 결국 쪼그라든 마음으로 역자 후기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완역 원고만 보냈다.
며칠 뒤 번역을 가르쳐준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첫 역서를 맡게 됐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던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대뜸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역자 후기는 쓰셨어요?”
선생님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출판사 요청이 없더라도 역자 후기를 써서 보내주면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고. 번역가가 알아서 역자 후기를 써서 보내줬는데 싫어할 편집자는 없다고 했다. 역자 프로필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그때 프로필과 같이 역자 후기를 보내주면 된다며 내게 꼭 역자 후기를 써보라고 했다. 쪼그라든 마음에 뜨거운 물을 들이부은 느낌이었다. 그래, 언젠가는 역자 후기를 쓸 날이 올 텐데 그때를 대비해 연습해본다는 마음으로 글을 써보는 거야. 책에 실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이 책은 내 첫 데뷔작이 아닌가. 훗날을 위해서라도 역자 후기를 써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며칠 뒤 일본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목적지는 ‘가마쿠라’라는 소도시였다. 얼마 전에 《츠바키문구점》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그 책에 실린 역자 후기가 인상적이었다. 번역가가 소설의 배경이 된 가마쿠라에 다녀온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역자 후기를 썼던 것. 나도 그 번역가처럼 가마쿠라에 가서 직접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다. 가마쿠라는 도쿄 근교에 있었고 마침내 첫 책의 저자는 도쿄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무슨 기막힌 우연이란 말인가! 나도 저 소설의 번역가처럼 책의 배경이 된 장소를 돌아본 뒤 역자 후기를 써보는 거다. 나는 여행 계획표에 ‘시모키타자와’를 추가했다. 그곳은 도쿄에서 유학하던 시절 내가 무척 좋아하던 동네였다. 그곳에 ‘책방 B&B’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