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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지윤 Dec 16. 2022

앞으로의 책방 여행

도서관에서 일하는 나는 겨울이면 휴가를 얻어 일본에 가곤 했다. 더위에 취약한 나로선 푹푹 찌는 여름의 섬나라보다 따뜻한 우동 국물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겨울의 일본이 훨씬 좋았다. 마침 첫 책의 번역 원고 마감 시기가 겨울이었다. 완역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자마자 나는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여느 때의 일본행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고즈넉한 소도시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역자 후기를 쓰기 위한 소재를 얻으러 떠나는 여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목적지는 한때 유학생 신분으로 두 해를 살았던 일본의 수도 도쿄였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그 도시에는, 젊은 시절의 푸릇푸릇했던 추억들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도쿄의 여러 장소 가운데 특히 내가 좋아한 곳은 시모키타자와였다.

시모키타자와는 유학시절 자주 놀러 가던 동네였다.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오는 날이면 나는 룸메이트와 함께 쇼핑을 하러 시모키타자와에 갔다. 거리에 즐비한 편집숍과 빈티지숍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지갑은 가벼워졌고 양손의 쇼핑백 개수는 점점 늘어갔다. 예쁜 옷을 사 입고 빈티지한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그 거리를 걷고 있으면 유학 생활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짤막한 유학 시절 동안 나의 케렌시아가 되어준 시모키타자와는 이번 여행의 목적지 가운데 하나였다. 첫 역서 《앞으로의 책방 독본》의 저자인 우치누마 신타로 씨가 운영하는 책방 B&B가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근 10여 년 만에 찾은 시모키타자와는 내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독특한 분위기의 빈티지숍이 즐비하던 거리는 온데간데없고 여기저기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쉽사리 눈에 띄었다. 조금은 씁쓸해진 나는 책방을 찾으려 골목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구글맵을 들여다봐도 도통 어디쯤에 책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지쳐서 어디 카페라도 들어갈까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순간, 초록색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시모키타자와의 좁다란 골목을 헤매던 끝에 푸른 초목을 연상케 하는 간판을 발견했다. ‘책방 B&B’는 그곳의 지하에 자리하고 있었다. 회색 테두리의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방의 사물들이 머금은 온기가 두 볼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도미노처럼 정중앙을 차지한 서가에는 입체적인 세계 지도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앞으로의 책방 독본》, 역자 후기에서 발췌


역자 후기 한 편 쓰겠다고 친구를 끌고 겨울바람 속을 헤매고 다니는 꼴이 우스워지려던 찰나, 그 노력이 가상하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 준 책방이 어찌나 구세주처럼 보였던지. 초록색 간판을 발견하자 우리는 얼어붙은 손을 맞잡고 새된 함성을 질렀다. 만약 이 여행을 한 편의 영화로 찍는다면 아마도 나는 이 장면을 오프닝으로 쓸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방 안에 들어서자, 번역하는 내내 글로만 상상해온 희미한 점선의 공간이 또렷한 윤곽이 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서가에 꽂힌 책 한 권 한 권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그 시간 동안, 신기하게도 머릿속 키보드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역자 후기에 쓸 문장들을 한 자 한 자 타이핑해나가기 시작했다. 책방을 둘러보는 일이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던 우치누마 신타로 씨가 카운터 구석에서 직원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말을 걸고 싶다는 욕망을 꾹 억누른 채 그 웃는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나는 그가 마련해놓은 세계일주를 마음껏 즐겼다. 머릿속 타자기를 바삐 움직이면서.



책방 B&B에서 보낸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았지만 역자 후기 한 편을 쓸 소재를 얻기에는 충분했다. 호텔로 돌아와 친구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아이패드를 열어 머릿속에 타이핑해둔 문장들을 바삐 메모장에 옮겼다. 기억이 뒤죽박죽이 될 때면 책방에서 사 온 독립출판물들과 책방 로고가 그려진 배지들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모락모락 김을 피어 올리며 친구가 욕실에서 나왔을 무렵에는 역자 후기의 초고가 완성되었다. 욕실에 들어가 치약을 짜며 나는 생각했다. 번역하는 일은 저자가 문장으로 완성해놓은 세상을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역자 후기를 쓰는 일은 여행기를 쓰는 것과 같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번역 여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는 꼭 이렇게 여행기를, 역자 후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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