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로
취향이 생기는 건 늘 우연에서 비롯한다. 도서관 서가에서 《빨강머리 앤》 시리즈와 마주한 뒤 이 책이 내 반려 책이 된 것도, 길을 걷다 구경삼아 들어간 화방에서 진열대에 빽빽이 꽂힌 물감을 보고 며칠 후 동네 문화센터에서 유화 수업을 듣게 된 것도 모두 우연히 벌어진 일들이었다. 소설가 김성중에게 빠져든 것도 어느 오후 들른 동네서점에서 사장 S가 지나가듯 우연히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 소설, 재밌는데.”
지극히 평범한 그 말에 홀리듯 보랏빛 표지의 《국경시장》을 손에 들고 값을 치른 뒤 얼마간 책상 구석에 방치해두다가, 또 어느 날 우연히 보랏빛 표지가 눈에 들어와 무심코 책장을 펼쳤는데 걷잡을 수 없이 소설에 빠져들게 되었다. 책에 담긴 단편들은 하나같이 신선하고 흡입력이 있었는데 그중 단연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표제작 <국경시장>이었다.
목적 없이 몇 개월째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던 한 남자가, 어느 만월의 밤에 우연히 ‘국경시장’에 들어갔다가 동행했던 친구도 대부분의 기억도 잃어버린 채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이야기.
땅과 땅, 혹은 바다나 강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가르는 ‘국경’은 왠지 두려움을 증폭시키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간이다. 그 경계에서 풀문이 떠오르는 밤에만 열리는 국경시장. 거대한 석조 사면상으로 장식된 시장 입구는 어쩐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유바바가 사는 온천으로 가는 수상쩍은 터널을 연상케 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치히로는 부모를 따라 어쩔 수 없이 터널로 된 입구로 들어가게 되는데, 온천으로 가는 길목에는 역시나 시장이 늘어서 있다. 주인도 없는 포장마차에서 식욕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음식을 집어먹다가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의 모습은, 소설 <국경시장>에서 남자의 친구들로 등장하는 주코와 로나를 떠올리게 한다. 책에 푹 빠져 살던 주코는 국경시장에서 파는 고서적을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게 되고, 로나는 자신을 괴롭혔던 슬픈 날들을 떨쳐내려다 급기야 모든 기억을 잃고 국경시장의 일부가 되고 만다.
경계 너머에 있는 세상에 함부로 발을 들인 대가로 주인공들이 기억을 잃어가는 설정은 영화나 소설이나 비슷하지만 두 작품의 결말은 확연히 다르다.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 ‘치히로’를 유바바에게 빼앗기고 ‘센’이라는 이름으로 온천에서 일하게 된 영화 속 주인공은 결국 자기 정체성을 되찾고 부모를 무사히 구출하여 현실세계로 되돌아온다. 소설 속 주인공은 기억을 판 대가로 얻은 비늘로 시장이 내주는 쾌락을 탐하다가 혼자서 겨우 그곳을 빠져나오지만, 지난 삶의 기억도 정체성도 잃어버린 그에게 남은 건 껍데기 같은 몸뚱이뿐이다.
유독 이 단편의 배경이 된 ‘국경시장’에 끌렸던 건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일 없이 무사히 현실세계로 복귀한 나는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시 내게 삐끗한 상황이 생기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는 열에 들뜬 그 세상에서 축 늘어진 채 맥없이 세월을 흘려보내지 않았을까. 이따금 그런 상상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내가 그 나라로 떠났던 때는 이십 대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나는 스스로 너무 늙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던 것 같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 공항에 내리자마자 얼떨결에 나이를 두 살이나 꿀떡 받아먹었다. 고작 두 해를 떠나 있었을 뿐인 내 나라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서른을 코앞에 둔 처지가 된 데다, 나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로이 살았는데 유독 나이를 따져 묻는 사회로 되돌아오니 마음이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게다가 외국과는 달리 적당히 걸러지는 일 없이 그대로 귀에 쏟아지는 타인의 말들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탄탄한 직장에 다니거나 결혼을 한 뒤 사회의 어엿한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반면 일본에서 돌아온 난, 그들 눈에 그저 팔자 좋은 유학생 놀이를 끝마친 뒤 빈둥거리는 취업준비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순간부터 괜히 돌아왔다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기회만 엿보던 나는 고국으로 돌아온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가방을 꾸렸다. <국경시장>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로나를 보고서야 떠날 마음이 생긴 주인공처럼 충동적으로 나는 더운 나라로 떠났다. 나를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