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어딘가를 달리고 있을 내 캠핑카를 상상하며
해가 갈수록 죽음을 생각하는 횟수가 늘어간다. 대개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막막한 슬픔에 빠지곤 하는데, 요즘은 자주 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마지막 날 풍경을 가만히 그려보다가 문득 어디에서 죽음을 맞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에서 주인공 사쿠라이 미카게는 생의 마지막 날을 부엌에서 맞이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부엌은 삶의 주요 무대이자 위로의 공간이며 죽음을 맞이해도 좋을 만큼 편안한 안식처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미카게가 냉장고 소리에 의지한 채 편히 잠드는 장면을 읽으면서 새삼 내게 다가올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나는 어느 공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까. 이왕이면 ‘미카게의 키친’ 같은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그곳에는 키 큰 책장이 켜켜이 들어서 있다. 조명이 닿지 않아 그늘진 공간이 자주 눈에 띄지만, 높다란 빌딩 숲에 드리워진 그림자 같은 느낌은 아니다. 한여름 태양을 피해 찾아든 어느 골목의 그늘처럼 책 그늘은 내게 나른한 안락함을 준다. 여기에서라면 나도 미카게처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곳, 도서관에서는 어느 여왕의 장례식이 부럽지 않을 만큼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애도를 받을 수도 있다. 분류번호 100번 대 서가 앞에 누우면 독주를 손에 든 소크라테스가 힐끗 내려다보며 조의를 표하고, 800번 대 서가 앞에 누우면 하루키가 진혼곡 대신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을 흥얼거린다. 좀 더 아기자기한 애도를 받고 싶다면 그림책 서가 앞에 슬며시 누우면 된다. 책을 먹던 여우와 카레를 훔쳐먹던 노랑 고양이, 알록달록한 빛을 반사하는 무지개 물고기가 세상에서 제일 왁자지껄한 애도를 해 줄 테니까. 이렇듯 십수 년간 사서로 살다 보니 자연스레 내 마지막 순간마저 서가가 일렬로 늘어선 풍경을 상상하고 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사서라는 직업이 내 천직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쩌다 보니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고, 거의 매일 서가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종이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도서관 초창기 시절만 해도 하루에 몇 번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책밖에 없는 이 공간이 답답했는데, 이젠 집에서도 내 자리 대부분을 책에게 내주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다 읽지 못할 책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놀랍게도 이런 나의 바람을,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사서의 바람을 고스란히 그려놓은 책을(역시 사서답지 않은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래픽 노블 ≪심야 이동도서관≫에는 도서관으로 꾸며놓은 캠핑카를 몰고 다니는 사서가 등장한다. 제목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 이 도서관은 심야에만 운영된다. 게다가 1인 도서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1인이란 오직 특정한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인 ‘알렉산드라’는 애인과 다툰 뒤 무작정 밤의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심야 이동도서관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이중초점 안경을 쓴 노신사가 운전석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노신사는 서가를 구경하겠냐고 물으며 명함 한 장을 내민다. 거기에는 [심야 이동도서관 사서 로버트 오픈쇼]라는 직함과 도서관 이용 시간이 인쇄되어 있었다. 개관 시간은 저물녘부터 동틀 녘까지. 조금 꺼림칙했지만 결국 알렉산드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캠핑카 안으로 오른다.
캠핑카 양쪽으로 나열된 서가들. 그곳에 자리한 책들이 뿜어내는 종이 냄새와 축축한 강아지 몸에서 풍기는 냄새. 어쩐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냄새들이었다. 게다가 서가에 꽂힌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전부 낯익은 제목들이다. 어찌 된 일일까. 그러다 한 서가에서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을 친구 삼아 편지처럼 써 내려가던 유년기의 글들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이건 제 건데요!”
사실 그 도서관은 오직 알렉산드라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심야 이동도서관≫ 속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든 태어나는 순간(책과는 인연이 먼 인생을 살게 될 운명일지라도!) 도서관이 하나씩 배정된다. 처음에 그 공간은 텅 빈 상태지만, 활자가 적힌 무언가를 전담 이용자가 읽어내기 시작하면 그제야 서가에 책이 한 권 두 권 채워진다. 즉, 오픈쇼는 알렉산드라의 전담 사서였던 셈이다. 놀라웠던 건, 오픈쇼가 관리하는 도서관의 서가에는 알렉산드라가 잠깐 읽고 버린 잡지나 시리얼 상자까지도 보관되어 있었다. 한 개인이 읽어낸 인쇄물을 모조리 장서로 보관하는 도서관이라니. 정형화된 책이 아니라 독특한 인쇄물들도 접하게 될 테니 사서 입장에서는 흥미롭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서가 정리에(이를테면 분류라든가) 무척이나 골머리를 썩일 것 같아 피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알렉산드라가 당황해하든 말든 오픈쇼는 묵묵히 사서의 일을 할 뿐이다. 자신의 일기장을 빌리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대출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는다며 딱 잘라 거절한 뒤 그는 동틀 녘이 되었으므로 그만 도서관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밤중 우연히 맞닥뜨린 신비한 심야 이동도서관에 마음을 빼앗긴 알렉산드라는, 그날 이후 무수한 밤을 거리에서 보낸다. 사서 오픈쇼를 만나기 위해. 그러나 심야 이동도서관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점점 알렉산드라의 삶에는 책들이 그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하고 그녀는 다시 독서에 몰두한다. 어릴 적 푹 빠져 읽었던 추리소설과 읽으려 애썼던 고전들, 몇 번이나 읽을 만큼 아꼈던 책들. 흑백의 기억으로 남아있던 책들은 하나둘 선명한 빛깔을 띠며 알렉산드라의 삶을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여 간다.
도서관에서 일하다 보면 책만큼 끈기 있는 대상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수천 권 이상의 장서가 보관된 도서관에는 알렉산드라의 기억처럼 흑백의 배경이 되어버린 책들도 적지 않다. 이용자의 시선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늘진 서가 한쪽에서 바래가는 책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책들은 좌절하는 법이 없다. 꿋꿋이 엉덩이를 붙인 채 때를 기다린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기를. 그리하여 책 본연의 색깔을 되찾게 되기를. 한 번 읽고 버려졌거나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책들이 심야도서관과의 조우를 통해 알렉산드라의 기억에 생생히 되살아난 것처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알렉산드라는 또다시 우연히 캠핑카를 발견하게 된다. 운전석에서는 여전히 사서 오픈쇼가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한달음에 심야 이동도서관으로 달려가 창문을 두드리는 알렉산드라. 그녀의 등장에 오픈쇼는 활짝 웃으며 맞아준다. 그토록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원망하는 그녀에게 오픈쇼는 그간의 도서관 사정을 설명한다. 직원이 부족하고 예산은 깎이고 사서의 일은 넘쳐나고…….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고 말았다. 맞아요. 혼자 일하느라 너무 힘들죠. 예산은 정말 턱도 없이 부족해요.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요. 네, 맞아요. 다 옳은 말씀입니다.
9년 만에 찾은 심야 이동도서관의 서가에는 첫 방문 때보다 훨씬 장서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월 동안 알렉산드라의 곁을 지켜준 건 말이 통하지 않는 애인이 아니라 묵묵히 속을 보여주는 책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덕분에 심야 이동도서관은 다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
오랜 기다림과 달리 심야 이동도서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동틀 녘까지 단 몇 시간뿐. 심야 이동도서관과의 다음 만남은 운이 좋다면 며칠 뒤의 밤, 어쩌면 수십 년이 흐른 뒤가 될 수도 있었다. 책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늘 알렉산드라의 마음은 한밤중의 아늑한 캠핑카에 가 있었다. 카오디오에서는 낯익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따뜻한 미소를 지닌 사서가 차 한 잔을 권해주는 그곳. 거기에는 그녀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과 기록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오픈쇼의 권유로 공공도서관 사서가 된 뒤에도 심야 이동도서관을 그리워하던 알렉산드라는, 결국 과감한 선택을 한다. 영원히 심야 이동도서관에 남기 위해.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곳에서도 계속 무언가를 하며 보내야 한다면 과연 나는 사서라는 일을 선택할까. 심야 이동도서관처럼 특정한 누군가를 전담하는 일이라면 선뜻 지원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곳에서는 때마다 행사를 기획하여 진행하거나 장서점검을 하며 사라진 책을 찾거나 예기치 않은 응대에 쩔쩔맬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서가를 꾸미고 그 사람만 응대하면 될 테니. 알렉산드라가 몇 년에 한 번씩만 심야 이동도서관을 발견했던 걸 보면, 전담 이용자가 우연히 도서관에 찾아오기 전까지는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오픈쇼처럼 운전석에 앉아서 음악이나 틀어놓고 읽고 싶은 책들이나 맘껏 뒤적거리면서 말이다. 물론 실제 사서의 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앞서 말한 분류의 어려움 같은 고충은 있을 테지만.
정말 어딘가에 심야 이동도서관이 존재한다면 단연코 서가의 규모 면에 있어서는 전 세계에서 사서들이 상위권을 달릴 것이다. 하루에도 의무적으로 수십 권씩 책 제목을 읽거나 책장을 들춰보길 되풀이하고 있으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좀처럼 상위권에 들어볼 일이 없는 나로서는, 심야 이동도서관의 장서 수 톱을 찍는 일이 퍽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앞으로 좀 더 부지런히 책들을 만지고 들춰봐야 하나. 나처럼 쓸데없는 경쟁심에 목매기 좋아하는 사서들이 있다면 ≪심야 이동도서관≫ 책을 권해주고 싶다. 덕분에 평소보다 더 책을 들여다볼 테니 덤으로 업무 능률이 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본인이 톱을 찍었는지 아닌지는 사후세계에 가서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