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두님 Sep 08. 2021

8월의 독서기록


#27. 여름의 빌라 - 백수린

이번 독서모임에서 내가 발제한 책.

백수린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잔잔하면서도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 전반적인 단편이 다 좋았던 것 같다.

속으로는 느끼고 있지만 차마 꺼내서 표현하지는 못했던 마음들을 꺼낸 듯한 내용들이 '나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 수 있구나.'라는 위안을 안겨주었고, 그러한 내용들이 다양한 주인공으로 단편마다 담겨 있어 좋았던 것 같다. 혼자 읽었을 때보다 같이 이야기 나누고 나니 더 풍부해지고 더 좋은 책으로 남은 듯 하다.

잔잔한 한국소설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언니의 마음, 견고하지만 연약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며, 누구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갈망하던 언니의 마음속 모순들은 빛과 어둠처럼 일렁이며 언니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저들은 불행한 거야. 불행한 인간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밤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 안 그래도 활활 타오르는 소문들에 풀무질할 거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면서 그 시간을 버텼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금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기보다는 인생의 단계 단계에 걸맞은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인생에 무언가를 기대한다니.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가. 그렇게 평생 동안 배신을 당해놓고도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놀라운 사건들이 가득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고, 자신에겐 인생을 하나의 특별한 서사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내 안의 무언가가 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은 것이 내가 아니라는 데 안도했고, 그렇게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타인과 연결되면서 작은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그 비좁은 자리로 되돌아가버린 걸까? 안전지대에 머무르고 싶다는 유혹을 포기하고 타인을 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404780



#28.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얼마 전에 읽은 다른 책에서 자주 언급되어 킵해두었던 책이었는데, 인스타그램에서 지인분 추천까지 받게 되어 꼭 읽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하루키의 에세이. 그러나 아쉽게도, 추천에 비해 내게는 엄청난 재미를 안겨주진 못했던 것 같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꽤 읽었는데 돌이켜보니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었던 지라, 그의 소설가로서의 소신, 생각 등이 담긴 책을 읽으니 참 아이러니했다. 덜어내는 것이 더 어렵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그의 태도, 균형적인 사고를 위한 그의 생각들, 무엇보다 꾸준함을 위한 노력들이 책 곳곳에 담겨 좋았던 것 같다. 다만 생각보다는, 그도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책을 읽고나서 급 읽고 싶어진 그의 소설책을 주문했다. 책에서 책을 소개받아 독서를 이어나가는 경험을 가진다는 건 참 좋은 것 같다.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기 시작하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합당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난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의 지금 서 있는 위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잘 보였습니다.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써야 할 것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작업에 숙달된다면, 그리고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깜짝 놀랄 만큼 '무겁고 깊은 것'을 구축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서 바람을 쐬게 한다, 혹은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양생을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덜 말라서 무른 것, 고르게 배어들지 않은 것이 나오고 맙니다.
만일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은 '간단히'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라도 어느 정도는 몸에 배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강함이란 신체적 강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타인과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금 상태를 최선의 모양새로 유지하기 위한 강함을 말합니다.
합의에서 얼마간 벗어난 곳에 자리한 비교적 소수파의 '예외'도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혹은 분명하게 시야에 넣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회에서는 그런 균형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런 균형을 어떻게 잡아나가느냐에 따라 사회에 폭과 깊이와 내성이 생겨납니다.
새로운 과제를 달성하고 지금까지 못 해본 것을 해내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작가로서 성장한다는 구체적인 실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지금 이곳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바라본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현재진행형의 나 자신은 웬만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워요. 어쩌면 그렇게 때문에 더더욱 나는 다양한 사이즈의 내 것이 아닌 구두에 발을 밀어 넣고, 그것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을 종합적으로 검증해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과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소설을 쓰면서 내게 엉겨 붙어 따라오는 '음의 기척'을 나는 날마다 밖에 나가 달리는 것으로 떨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462878



#29. 다른 방식으로 보기 - 존 버거

독서모임 책으로 읽었는데, 분명 페이지는 넘어가는데 내가 이해하고 넘기는 게 맞는지 라는 의문 반으로 읽은 책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독서모임 토론에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는 전시를 볼 때 작가의 의도에 많은 의미를 두고 감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책에서 언급한 작가 외 작품 주인공이 그림 밖의 사람들을 어떤 의중으로 바라보는지 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흥미로웠다. 시간의 흐름에 기반하여 쓴 책이라, 뒤에서는 현대 광고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광고가 현재가 아닌 미래에 관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재밌었던 것 같다. 꽤 오래전에 쓰인 책이라 현재와는 다른 부분들이 있었고 평론가의 글이라 그런지 이해가 쉽진 않았지만 흥미로운 요소가 꽤 많았던 책.


카메라는 사물의 순간적인 모습들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든 이미지에는 시간이 없다는 관념을 깨드려 버린다.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당신이 보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 당신의 위치와 관계가 있다.
한 그림 이미지를 복제한 영화는 관객들을 그 그림을 통해 영화를 제작한 사람의 개인적인 사고로 인도해 간다. 그 그림은 영화 제작자에게 작품의 권위를 빌려 준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문제의 예술가들이 죽고 나면 전통은 그의 작품에서 몇몇 기술적인 요소들만 받아들인 후, 마치 원칙 자체는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계속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신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980859





지난 달은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론한 책이 많았다.

매번 토론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나 혼자 읽고 말았다면 아쉬웠을텐데,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을텐데 하는 생각의 확장을 늘 하게 해주어 토론의 경험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듯 하다. 같은 구절을 읽고도 다르게 생각하고, 각자의 생각을 이렇게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코로나 시국에도 가질 수 있어 너무나 소중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8월의 독서경험도 알찼네.


매거진의 이전글 7월의 독서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