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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연 Dec 02. 2022

원영영원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어느 한 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말끔하고

  어느 한 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있고


  멈춘 생각을 뽑아다 상자에 붙여놓고

  이 상태를 유지하기를, 혹은 영원히 벗어나주기를


  바랄 수 있을까?


  상자한테?


  이것은 구멍이 하는 말이다.

  구멍 뚫린 구멍이 하는 말이다. 구멍 뚫린 구멍이 구멍 뚫린 구멍에게 하는 말이다.


  뚫린 구멍으로 무수한 구멍이 하는 말이다.


  너는 정말 구멍이 많구나.

  온갖 구멍투성이야.


  그렇게 많은 구멍을 가지고 지금껏 용케 살아 왔어.


  이 모든 것은 나중에 슬픔이 될 거다.

  너는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이니까. 모두 너를 노리고 네게 달려들 테니까.


  슬픔만 있고 아픔이 없는 구멍에게 소원이 있다면

  차라리 아픔을 영원히 느낄 수 없을 거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


  진짜 슬픔만 있을 거라는 약속이 있는 것.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언가에 전전긍긍하는 걸 멈추고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는 걸 멈추고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영원히 열려버리고 말 텐데, 터져버리고 말 텐데,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만들게 될 텐데.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가 없게 될 것이고


  원본과 동시에 창작되는 복사본이 되어

  구멍이 몇 개 뚫렸는지 알 수 없는 구멍이 되어


  구멍으로 드나드는 중에 사랑 아닌 게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열어둔 문을 두고

  열려 있는 구멍으로 다니며


  또 구멍을 뚫을 상자를 준비하세요.


  사랑을 준비하세요.

  사랑을 준비하세요.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건 상자일수도 상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이번에 준비해둔 건 다음에 쓰게 되고요,

  지금은 지난번에 준비해둔 것입니다.


  네 몸에 이식된 신은 너무 아파한다.

  몸은 처음이라


  구멍을 찾아다닌다.









<현대시>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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